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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눅14:15-35)

by 똑똑이채널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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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수님은 베다니 마르다의 집을 거처삼아 예루살렘을 다니며 선교여행 중에 계시는 상황이죠. 이때 예루살렘 인근의 잔칫집을 보게 되셨는데, 다들 상석을 차지하는 모습이었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낮은 데 처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말씀해 주셨죠. 또한 잔치를 벌일 때 그 손님들은 되갚을 능력이 있는 자들보다는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청해서 잔치를 열도록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과 같은 연약한 자들을 말입니다. 그것이 머잖아 하늘나라의 상급이 될 것이라고 일깨워주셨죠. 그것이 곧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른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잔치의 비유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말한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되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제 16-24절을 통해 비유로 말씀을 해 주고 계시죠. 전반적인 주님의 말씀이 무슨 내용입니까?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벌였는데, 다들 핑계를 대면서 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밭을 샀으니 밭에 가봐야겠다는 사람, 소 다섯 겨리 곧 10마리를 새로 샀으니 밭을 갈기에 적당한지 시험해보러 가봐야겠다고 하는 사람, 또 장가들어 아내를 보러가야 하겠다는 사람 등. 다들 핑계를 대면서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그 종들에게 말하죠.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자들, 맹인과 저는 자들을 청하여 데려오라고 말이죠.

이런 상황의 비유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천국잔치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주님의 그 잔치에, 영생의 잔치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다들 자기 욕심과 자기 정욕과 이생의 것에만 매달린 채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모습이죠. 그래서 오히려 이 세상의 것에 미련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청하여 함께 그 잔치에서 즐기자는 것이죠.

그만큼 주님의 청함이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이 있을 때, 먼저 그 분의 나라와 의를 좇는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 반문하시는 말씀이죠. 이 세상의 것에만 집착한 채 궁극적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잔치를 외면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머잖아 가야 할 저 본향, 곧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있음을, 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25절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목에 지금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이미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죠. 그리고 지금 그들과 더불어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뒤따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죠.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목포에 뜨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죠. 심지어 야구 선수들이 와도, 그들이 타고 있는 버스에서 내릴 때 그 얼마나 많은 팬들이 그 버스 주변에 몰려들겠습니까? 예수님의 팬들이 그렇게 날이 갈수록 점점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행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민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제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제자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 아닙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을 좇는 성도들이 우리 시대에 주님의 제자들이죠.

스승이 존경받는 분이라면 제자들도 자부심이 들죠. 하지만 스승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지탄 받으면 어떤 제자라도 좋아할 리가 없겠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지지를 받고 있으니, 주님 앞에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자부심이 강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 과연 그들이 기쁨으로 주님을 따랐을지는 의문이 들게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내세우셨기 때문이죠.

첫 번째 조건이 바로 26절의 말씀처럼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결코 문자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내 부모와 형제, 자매를 미워하라는 것은 만약 이들이 주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요구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족이라 할지라도, 혈육과 단절을 각오하고서라도 불의와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것은 단순하지만은 않죠. 일례로 제사를 드릴 때 그것에 대해 우상숭배로 여기기 때문에 부모님과 형제와 단절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를 유교적 관점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의미로 표현한다면 결코 우상숭배가 될 수 없겠죠. 절하는 행위 자체도 귀신을 대상으로 하면 우상숭배가 되겠지만, 그러나 존경과 감사의 동양적인 예의 차원에서 행하는 모습이라면 기꺼이 용납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란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째 조건도 제시합니다. 26절 중반부의 말씀처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경솔히 여기라는 의미가 아니죠. 불의에 굴복하는 자신을 철저하게 미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조건도 말씀하십니다. 본문 27절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지고 퍼포먼스를 하는 경우를 언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끝에 바퀴를 달아놓고 밀고가는 모습이죠. 그렇게 형식적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수많은 무리들 역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가식적인 종교인들을 혼내주고 있기에, 그 길이 무척 쉬운 길인 줄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요, 자기 부인의 길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명예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굴욕과 죽음이라는 자기 희생의 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네 번째 조건도 있습니다.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은 재물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죠. 재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내 손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재물로 인해 하나님을 경시하게 된다면, 삶속에서 하나님 보다 재물에 우선권을 두게 된다면, 그 재물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식당을 하는데 주일날 영업의 이익이 주일예배보다 더 우위에 서 있다면 기꺼이 주일영업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과 같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두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34절을 통해 밝혀주는 소금의 가치요, 참된 제자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그 길, 자기 부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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