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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 그런 말씀을 드렸었죠.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 그 피를 제단에 뿌렸다고 말입니다. 또 실로암 연못가의 수로와 망대를 세우다가 사고사로 18명이 죽었다고 말이죠. 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들이 큰 죄를 범한 까닭이었다는 뜻이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관점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그들보다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이 더 의로워서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 오히려 “너희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들과 같이 망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죠.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그들의 재판관이나 판단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을 통해 너희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겸손한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들보다 의롭고 깨끗해서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다고, 자기 의의 착각 속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죠. 누군가 장애아를 낳았을 때에도 그런 판단과 편견을 버리고, 오직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마음과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씀을 보다 실제적인 비유로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었죠.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째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의견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쩌면 그렇게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포도원 지기는 그 주인에게 간청을 한다는 것이죠. 올 해에 한 번 더 참아주세요. 제가 거름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잘 키워서 내년에는 꼭 열매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와 같다면, 그래서 당장이라도 뿌리채 내 인생을 뽑아 버린다면, 우리가 과연 이 땅에 떵떵거리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죠. 열매 맺지 못하는 나 자신일지라도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처럼 너희들도 다른 사람을 대하고 판단하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은혜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바라보고 포용하고 수용하며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나눈 말씀에 비춰 본다면, 나는 지금도 목마른 자입니다.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생수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입니다, 하는 고백을 하며 살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지만 그들 스스로에게는 내세울만한 의로움도, 깨끗함도 없었고, 오직 그들이 물가에 심기운 버드나무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더욱이 가롯 유다 대신에 맛디아가 주님의 12명의 사도에 포함될 수 있는 그 선택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였다고 했죠. 그와 또다른 경쟁자였던 요셉처럼, 맛디아의 집안이 남달리 좋아서, 아니면 그가 유능해서, 가문이 좋아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 뜻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 곧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맛디아가 주님의 12사도에 선택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 것, 우리가 주님을 위한 종이요 집사요 시중드는 웨이터로 섬길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유능함이나 능력이나 가문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나를 구원해 주시고, 목사로 권사로 집사로 선택해 주신 것, 그 모든 게 주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라면, 함부로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도 그와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린 채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허리가 구부러져 몸을 펼 수가 없는 여인이었죠. 그런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그녀 속에 든 귀신과 그녀의 병을 모두 몰아내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자신의 몸을 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모두가 기뻐하는 무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 14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그곳의 회당장이 그녀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분을 내는 모습이죠. 이른바 안식일에 할 게 아니라 다른 평일에 하라고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5절에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만일 너에게 소나 나귀가 있다면 안식일에 목말라 하는 소나 나귀를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너의 소유물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에 말입니다. 그런데 18년 동안 그렇게 사탄에게 매여서 허리도 펴지 못한 그녀를 안식일에 풀어주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죠.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도 목마르면 물을 마실 것이고, 너의 가축 떼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18년 동안 귀신에게 고통당하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사람에게 그 사랑과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그 회당장은 그만큼 자기 자신이 판단자,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서고자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자아나 그의 의로움으로는 아무런 것도 내세울만한 게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18-21절 말씀이죠. 바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천국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데, 그것이 자라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또 누룩처럼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죠.
무엇을 비유로 한 말씀입니까? 좀 전의 그 회당장처럼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 판단과 자기 옹졸한 간장종지와 같은 마음을 지녀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공중의 새들조차 날아와 깃들 일수 있는 곳, 그 마음이 누룩처럼 커져서 누구라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마음으로 포용하고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 밭도 천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찌 내 의지나 내 자아나 내 능력으로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목마른 자임을 인식하면서 살 때, 내가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셔야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그때 내 심령도 천국으로 일구어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나의 마음의 가지도 커지고, 내 심령도 누룩처럼 더욱더 커져서 한 사람이라도 더 품을 수 있는 넓은 심령의 소유자, 진정한 천국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오늘도 그런 은혜가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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