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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2-35)

by 똑똑이채널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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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죠. 주님의 말씀에 지적으로 깨달은 바를 동의하고, 또 마음에 감동을 받아, 삶 속에 순종하는 삶이 그것이죠. 삶 전체가 예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는 것이요, 그것이 구원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마태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죠. 마태복음 7장은 갈릴리 주변의 산상수훈을 통해 하신 말씀이고, 오늘 읽은 누가복음 13장 22절의 말씀은 베다니의 마르다의 집을 거처삼아 이제 예루살렘으로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받는 백성은 단지 입술로 주님을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그 삶으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입술의 고백을 넘어 손과 발 그 삶으로 순종하는 자 말입니다. 주님의 그 말씀으로 우리 시대를 조명하면 어떻겠습니까? 종교인구조사 통계(2014갤럽통계)를 보면 대한민국 국민의 28%가 크리스천이라고 발표했습니다. 5100만명의 우리나라 국민 중에 약 1800만명이 크리스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구원받은 자는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형국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왜 그런 질문을 던졌겠습니까? 예수님 주위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기적을 맛보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에서 놓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진심으로 주님께 자기 삶을 의탁하며 믿고자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명을 고쳐주셨을 때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주님께 나와 진정으로 감사한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그들 모두는 자기 문제를 해결 받은 것에만 만족할 뿐, 진정으로 주님을 구원자로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이들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를 바라본 어떤 사람이 주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24절을 통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와 똑같은 내용을 마태복음7:13-14절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의 답변은 구원 받는 자가 적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넓은 길은 구원으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똑같다는 것이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본성, 우리의 자아, 우리의 탐욕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 우리의 자아, 우리의 욕심은 세상의 넓은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좁은 길, 우리의 본성과 자아를 거스르는 것은 찾는 자가 적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9장 23절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지 않았습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를 부인하는 것은 나의 본성과 나의 자아를 부인하는 걸 말합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좇는 것,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죠.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할 때에만 그 길을 좇을 수 있는 것이죠. 그 은혜 안에 거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자아를 거스르는 길을 힘써 싸울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는 그 ‘힘쓰다’는 단어는 ‘아고니조마이’(ἀγωνίζομαι)는 ‘다투다’는 뜻입니다. 운동경기나 전투에서 적과 싸우기 위해 분투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살려고 분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좁은 길을 택하고자 영적인 싸움을 하는 이들은 많지 않죠. 육적인 자아와 분투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려고만 하지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드물죠. 말씀에 순종하기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두들 지름길로만, 편리한 길로만 가려고 하지, 돌아가더라도 정도로 걷고자 영적인 싸움을 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욕과 분투하며 좁은 문을 선택하는 사람이 드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주님의 말씀처럼 구원받는 자가 적을 수 밖에 없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길을 걸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좁은 문으로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키시면 십자가의 길로 앞장서 가지 않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자신의 온 의지를 다해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애써 기도하셨죠.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그야말로 분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2절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한 번 그 좁은 문, 곧 십자가로 향하는 자신의 여정을 확인시켜 주시죠.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지금 무화과나무가 많다는 그 베다니의 마르다의 집, 곧 마리아와 오라버니 나사로의 집이기도 한 그 집을 거처삼아,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하는데,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겠다는 말씀이시죠.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자기 인생을 가리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15:31, 고전9:27)고 고백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에서 장로들과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는데, 그때 다들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렸죠. 하지만 그는 그 길이 좁은 길이요, 그 길이 죽음의 길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며 가지 않았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이틀이, 우리의 직분과 역할이 구원을 증명해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순종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분투해야 구원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25절 말씀처럼 “주여 문을 열어주소서.”할지라도, 또 26절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자들 아닙니까? 또 마태복음7장 22절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사역을 했고 귀신도 내 쫓고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주님께 묻지만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27절에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직분이, 아무리 목사라 해도, 장로 권사 집사라 해도, 아무리 위대한 사역을 해도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로 판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자아와 정욕을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고, 좁은 길을 분투하며 싸워나갈 수 있는 은혜 안에 거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아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좁은 길, 그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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