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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베다니 마르다의 집을 거처삼아, 이제 예루살렘으로 선교여행을 다녔죠. 그때 한 사람이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통해 병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자기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따르는 이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자기 본성과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길에 고군분투하라는 당부를 해 주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입바른 소리, 곧 말만 번지르르 하신 분이 아니셨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할때에도, 주님은 “내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당신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의 그 길, 그 좁은 길을 피하지 않는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죠.
그렇기에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목사라는 직함, 장로나 권사나 집사라는 그 직함이 천국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직함이 있든 없든, 그 직분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나의 삶에 순종하며 사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나의 본성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사는 좁은 길을 싸워나가며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할때에만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6절 말씀은 안식일에 주님께서 수종병을 앓고 있는 한 사람을 고쳐주신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안식일을 맞이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을 잡수러 들어가셨는데, 주님의 발 앞에 이미 수종병 든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종병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드로피코스’(ὑδρωπικός)는 ‘휘드로’(ὕδωρ) 곧 물 즉 책체 성분과 관련이 있는 질병입니다. 정확한 병명은 알 길이 없지만 보통 우리말로 ‘고창병’으로 알려진 병이죠. 혈액 중의 액체 성분이 신체 조직의 특정 부위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라고 하죠.
바로 그 병을 앓고 있는 자가 주님의 발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병을 깊게 앓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하죠. 한 부류는 완전히 절망하여 포기해 버리는 부류고, 다른 한 부류는 이것 저것 모든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제는 민간의료법이나 대체의학이나 아니면 미신이나 굿이라도 해보고자 끝까지 매달리는 부류입니다. 오늘 본문의 수종병 앓고 있는 사람은 아직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고, 마지막 끈이라도 붙잡고자 주님께 나온 사람이죠. 그만큼 간절한 소망을 안고서 주님께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곳에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탐탁치 않게 눈치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그래서 주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본문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무슨 말씀입니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게 옳은 일이냐, 그렇지 않는 일이냐, 하고 물으셨던 것이죠. 그때 그들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 모습이죠. 적어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수종병 걸린 사람을 데려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주셔서 그 집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씀이, 아예 아무런 대답도 못하도록 쐬기를 박는 말씀을 해 주시죠. 본문 5절에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예수님의 완승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율법교리로는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그가 완전히 자유하게 해 주셨으니,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게 이번 한 번 뿐이었습니까? 누가복음 4장에 갈릴리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내 쫓아주셨고, 누가복음 6장에도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누가복음 13장에서도 주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왜죠?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의 주인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요, 주님은 그 안식일에 누구라도 영생을 얻고 그 육신도 회복되기를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영적인 수종병 들린 사람들입니까? 누가 영적으로 귀신들린 자들입니까? 누가 영적으로 손 마른 사람들입니까? 누가 과연 영적으로 허리를 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안식일에 귀신을 내 쫓아서는 안 된다고,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그 육신을 고쳐주는 것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 아닙니까?
그들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 앞에 목말라 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본성의 기준, 자기 자아로, 자신들의 의로움을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목말라 하는 자로 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자신들도 그 어떤 환경과 상황에 처한다 하지라도, 주님 앞에 목말라 하는 자로 서게 되면, 주님의 은혜를 덧입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이제 본문 7-14절까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시내에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어떤 광경을 목격하신 것이었죠. 어떤 잔치를 여는 곳이 있었는데, 다들 상석을 선택하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보시고서 주님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11절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 넓은 길을 추구하는 자들,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은 다들 상석을 차지하려고 할지 모르지만, 너희들만큼은 더 낮은 자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이어지는 본문 12절 이하의 말씀은 잔치 때 어떤 사람들을 청해서 음식을 먹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너희들에게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13절 말씀처럼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들은, 되돌려 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라는 뜻이죠. 그렇게 하면 복이 될 것이요, 뿐만 아니라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다’ 곧 하늘나라의 상급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죠.
오늘 하루도 주님, 나는 목마른 자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통해 나의 연약함과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의탁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높은 데 마음을 두기보다 낮은 데 마음을 두며, 누군가에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흘러보낼 때 갚을 수 없는 연약한 자들에게 그 사랑을 흘러보내는 천국백성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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