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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이제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받아들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이셨죠. 그때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땅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곳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거부했죠. 제자들은 당장 하늘에서 불을 명하셔 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어리석은 과시욕, 예수님을 대동하여 어떤 능력을 펼쳐보이고자 하는 그런 과시욕을 꾸짖으면서 조용히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셨죠. 그러는 중에 주님을 따르겠다 이들이 있었고, 또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도록 명령한 이들도 있었죠. 하지만 그들 중에는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고 나서 따르겠다고 한 이들도 있었고, 가족들과 먼저 작별을 고한 이후에 주님을 다르겠다고 한 이들도 있었죠. 주님은 그들을 향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비인격적인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다 볼 때 육적인 상황과 영적인 상황에 겹칠 때가 있고, 그럴 때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그 상황 속에서 따로 70인을 세우신 일, 그래서 각각의 동네에 들어가 둘씩 보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한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런 과정을 펼쳐보이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본문 2절의 말씀처럼 “추수할 일꾼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직접적으로 그런 과정을 펼쳐 보일 기회가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있지 않아도 어떻게 너희들이 각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할지, 미리서 시범을 펼쳐보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깨워주신 말씀이 나오죠. 본문 3절에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너희들을 둘씩 보내는 이 일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리들로 인해 잡혀 먹힐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 세상은 악한 공중권세 잡은 마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능력으로 무장해도 정말로 잘 분별하며 주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무엇을 주문한 것입니까?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따로 챙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딴 주머니를 차지 말라’는 뜻이죠. 그래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하나님의 평안을 빌라고 하죠.
그래서 그 평안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 집에 머물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너희들의 자의대로, 너희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 어떤 집은 평안을 빌고, 어떤 집은 평안을 빌지 말라는 차원이 아니죠. 너희들의 기분이 좋고 너희들의 기분이 좋지 않는 곳에서건, 하나님의 평안은 일단 빌어주라는 것이죠. 그 뒷일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평안을 받아들이고, 너희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다 받고 마시도록 하라고 하죠.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게 마땅하다면서 말입니다.
또 9절에서는 이런 당부도 하십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각 동네에 둘씩 둘씩 보내면서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 그 중에는 귀신들려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 모든 이들을 고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신 모습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도록 하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본문 12-16절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의 말을 들으면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누구든지 너희를 배척하면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배척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70명의 제자들을 둘 씩 둘 씩 파송하신 지역과 동네가 바로 고라신이고, 벳새다고, 또 가버나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고라신’은 갈릴리 바다 북쪽 끝 동네를 가리키는 곳입니다. 또 뱃새다는 어느 곳입니까? 뱃새다 벌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장소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행하신 주무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통해 능력을 체험한 그들이 더 믿고, 의지하며, 회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사람들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다른 지역들보다도 더 악하다고 통탄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을 통해 체험한 기적이 그들의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지정의를 좇아 믿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지식으로 깨달아 알고, 지식으로 깨달은 바를 마음의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감동으로 받아들인 바를 온 의지를 다해 좇아나가는 것, 그것이 바른 믿음인 것이죠.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은 단지 눈에 나타난 기적에만 매몰된 채 지정의의 바른 믿음이 성립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17절의 말씀도 똑같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주님께서 파송한 제자들이 각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귀신들이 떠나간 것을 보고 기뻐서, 주님께 보고한 모습이죠. 그때 주님께서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을 내가 보았다”고 18절에서 말씀하시면서, 대신에 그걸로 인해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20절에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은 본문의 상황을 볼 때, 우리에게 정작 더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게 있습니다. 본문 21-23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와 능력을 나타내 주셔야 믿을 수 있고, 또 계시를 받은 자라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고, 제자들의 심령에 믿음의 눈을 열어주셔야 그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그 믿음의 출처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내 마음 속에 좌정하셔서 내가 믿을 수 있도, 지식으로 감정으로 의지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내게 계시해 주셔야, 밝히 드러내 보여주셔야, 숨김이 없이 나타내 주셔야, 내가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어린 아이 같은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더욱더 겸손하게 큰 믿음을 달라고, 주님의 모든 능력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더욱 겸손히 간구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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