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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51-62)

by 똑똑이채널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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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휘황찬란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신 그 사건 이후에, 산에서 내려오셨는데, 제자들은 귀신 들린 어느 아버지의 그 아들의 귀신을 내 좇아주지 못한 것을 두고, 더 겸손히 기도할 것을, 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팔려 죽게 될 것을 또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관심사는 주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죽으시는 그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의 나라의 관좌를 취하시면 누가 영의정 좌의정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그 다툼과 변론으로 들썩였죠. 그때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내가 전하고 선포하고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다른지 어린 아이 하나를 붙잡고 세워서 이야기해 주셨죠.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작고 여린 이들을 섬기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저 천국에서 가장 귀한 상급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굳힌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51절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그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상황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곳으로 가야만 당신이 온전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신 것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이 바로 그 분기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껏 갈릴리를 중심 무대로 삼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누구든지 주님을 메시아로 곧 구원자로 모시는 자들의 심령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죠. 하지만 누가복음 9장 너머의 예루살렘 행을 내다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머잖아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누구든지, 갈릴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도, 수많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제물로 내 놓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내다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잠시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상황이 생겼던 것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곳 사마리아에 예수님께서 미리 사자들, 곧 당신의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53절에 따르면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그리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증언해 주죠. 이유가 뭘까요?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 앗수르 제국의 왕 살만에셀이 그곳 사마리아 땅에 이방 남자들을 그곳에서 살게 하면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완전히 혼혈족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본래 한 피를 물려받았던 남쪽 유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상종못할 더러운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여겨서, 그들을 개나 돼지처럼 짐승취급했던 것이죠. 그래서 발걸음조차 뚝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도 엄밀히 따지면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 누가 감히 예수님가 제자들을 환영하려고 하겠습니까? 바로 그런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게 사미라아의 수가 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장면이 나온 요한복음 4장에 나와 있죠. 그때 그녀도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하고 예수님께 말한 바 있었죠.

그러니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 곧 사신들을 먼저 보내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누구 하나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죠.

 

그런데 그런 상황을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 곧 야고보와 요한이 어떻게 말합니까? 본문 54절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말한 것이죠. ‘예수님. 저들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것을 보셨죠. 지금 불을 명해서 저들을 다 멸해버리십시오.’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셨고” 그러면서, 다른 마을로 가셨다고 증언해 줍니다.

제자들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메시아인 줄도 모르고 있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고, 설령 그들이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알고 있음에도 아직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지 않는 그들의 심령에 대해 안타까워하신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있는 격입니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님을 그들이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해보고픈 그런 마음 아니겠습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게 실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도, 아니, 내 마음 속에도 싹이 틀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를 줄 때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 지금 당장 벌을 당하게 해 주세요, 솔직히 그럴 때고 없잖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까? 나를 반대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주님께서 한 번 벌을 내려야 그가 정신을 차릴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 아버지의 한 없는 주님의 마음을 달라고 더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문 57절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사마리아 지역이 아닌 다른 길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신데, 그때 어떤 사람이 나온 것이죠.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 말씀만 놓고 봐도 그 당시에 주님의 제자처럼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죠. 그것은 이미 누가복음 6장 17절에서 확인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때도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 있었고, 주님께서는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12명을 택해서 사도로 삼으셨던 일 말이죠. 그를 위해 주님께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면서 주님 앞에 나온 것이죠. 이때 예수님께서는 58절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면, 나처럼 기거할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신 말씀 아닙니까?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하신 말씀이죠.

그러면서 또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죠. 59절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하고 말입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합니까? 나로 먼저 아버지를 장사한 뒤에 따르게 해 주세요,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61절 말씀처럼 “나로 먼저 내 가족과 작별을 고하고 따르도록 허락해 주세요.”하죠. 그때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이 무엇을 일깨워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부모를 무시하고, 장례식을 무시하라는 차원이 아니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내 제사로 산다는 것은 나처럼 머물 거처도 마땅치 않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요,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살다보면 너의 가족과 형제들을 부양해야 하는 일보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보다 더욱 우선순위에 둬야 할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주님의 제자들은 때로 이 세상의 가치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영적인 일에 매진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죠. 우리 삶에 우선순위를 오늘도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둘 수 있도록, 그런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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