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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가지, 율법조항의 핵심, 그것을 압축하고 압축한 십계명의 핵심은 두 가지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말이죠. 주님께서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율법교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말이죠.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약을 발라주고, 여관에 데려가 치료해 주고, 다음날에도 괜찮아질 때까지 더 돌봐주고 만약 비용이 더 든다면 자신이 와서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한, 그 사랑의 관심과 돌봄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켜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듯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도 그런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이고, 믿음은 용기요, 믿음은 시선이고, 그 믿음의 시선을 견지하면 견지할수록 신실한 삶으로 그 믿음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에게 그와 같은 순종의 삶을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머리로 믿는 믿음을 감정으로 느끼고, 감정으로 느낀 믿음을 손과 발 곧 온 의지를 다해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둘은 자매입니다. 둘의 오라버니가 바로 나사로죠. 죽은 지 나흘된 그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내셨는데, 바로 그 나사로 말입니다. 그들이 사는 동네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2.5km 남짓 동쪽으로 떨어진 마을입니다. 그곳은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는 곳이죠.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장소도 바로 감람산으로, 베다니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을 하죠. 본래 ‘베다니’라는 동네의 이름은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그들 세 남매는 상당한 재력가 집안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죠. 왜냐하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하러 왔고, 그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예루살렘 사람들조차도 그곳에까지 와서 문상을 할 정도였기 때문이죠. 그 정도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 지역의 유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졸부차원의 유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세 남매 중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부어 드릴 정도였죠. 그 정도로 그들의 생활은 여유로웠는데, 그들 세 남매는 자신들이 가진 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는데 헌신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그 세 남매의 집을 거처로 삼아 종종 머문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을 하죠.
그만큼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기 까지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집에서 주로 머무셨기에, 그 세 사람들과는 친밀했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그 여동생 둘이 예수님께 그렇게 말할 정도였죠.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11:3)하고 말입니다. 그 정도로 세 남매는 그 집에서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그곳 베다니의 집에 나타났을 때 마리아가 슬퍼 울면서 주님께 말했죠.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평소 머무시던 이곳에 쭉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당장에 살려내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함께 아파하셨고, 급기야 그 동굴 무덤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서 그를 살려내 주셨죠. 이런 사연과 애환과 눈물이 서려 있는 곳이 바로 나사로의 집, 다른 말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8절은 그 세 남매의 위치 가운데 마르다의 위치를 알려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누가 주님을 영접하여 들입니까? 그렇죠. 마르다죠. 그런데 그 세 남매의 집을 누구의 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 세 남매가 사는 집을, 오늘 누가복음에서는 ‘마르다의 집’으로 소개할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마르다가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죠. 본래 ‘마르다’라는 이름은 아람어 ‘마르’(mar)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 그 뜻은 ‘집 주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그 세 사람의 집 주인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 수난을 받기 위해 지나가실 때 그 예수님을 모시고자 한 사람도, 모실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도, 그 영향력을 힘껏 발휘한 사람도 마르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한 마디로 말해 그녀는 주도적인 행동파 신앙인이었던 것이죠. 그에 비해 마리아는 어떤 신앙인으로 볼 수 있을까요? ‘마리아’란 이름은 구약성경에 ‘미리얌’으로도 부르는데, 신약성경에서 ‘마리아’로 굳혀지게 되었다고 하죠. 그녀에 대해 오늘 본문 39절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리아는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신앙인이었던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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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적극적인 행동파 신앙인인 마르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40절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가 주님을 영접하여 초대했고,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을 위해 뭔가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상황인데, 그런데 여동생 마리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발치 앞 가까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면서 듣고 있는 상황이죠.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죠. 내 동생이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도록 명령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죠. 마르다는 믿음이 적어서 행동이 앞서는 사람, 그러나 마리아는 믿음이 좋아 어떤 행동에 앞서서 예수님의 말씀을 더 먼저 귀기울이며 생각하는 사려 깊은 신앙인,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손님을 초대했을 때 누군가는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닙니까? 교회에서도 누가 그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정성스레 맞이합니까? 새신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믿음이 좋고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 먼저 믿은 사람들이 그렇게 섬길 수 있는 법이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리아보다 마르다가 훨씬 더 헌신적이고 믿음이 출중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우리 주님의 관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본문 41-4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일깨워주는지 알 수 있겠죠? 뭔가를 많이 해서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한 두 가지에 집중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죠. 더욱이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칭찬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턱대고 행동하여 자기 과시를 얻고자 하는 것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곧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행동하는 것, 그때의 행동이 비록 한 두 가지뿐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더 좋은 길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무언가 행동하기에 앞서, 무언가 나의 과시를 드러내고자 하기에 앞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더욱더 주님의 발치 앞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그런 은혜가 먼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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