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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5-13)

by 똑똑이채널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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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에 나온 주님의 여섯 가지 특별한 기도를 우리가 살펴봤고, 또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주님의기도’를 가르쳐 준 내용도 살펴봤었죠. 마태복음과 다른 누가복음만의 ‘주님의기도’는 하늘이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부분은 부각돼 있지 않았다는 점, 다만 매일매일의 실제적인 삶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한 부분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특별한 여섯 가지 기도나 특별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주님의기도가 실은 우리들의 일상의 기도가 돼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기도가 우리의 일상의 기도가 될 때, 그 기도는 습관을 좇는 기도가 될 것이고, 습관을 좇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가장 흡족하게 여기실 기도요, 그때에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기도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기도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5절로 이어집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알려주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친한 벗이 여행 중에 먹을 것이 없어 떡을 달라고 찾아왔는데, 이미 문은 다 닫혔고, 침실에 모두 누운 상태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벗에게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벗 됨으로 인해서는 주지 않을지라도 ‘간청함’ 때문에 그의 요구대로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간청함’에 대해 새번역성경에서는 아주 원색적으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하고 말입니다. ‘간청함’을 ‘졸라대하는 것’으로 번역해 놓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간청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는 ‘부끄러움을 모르는’(shamelessness) ‘뻔뻔스러움’(impudence)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왜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간청하겠습니까? 왜 뻔뻔스러움도 내팽개친 채 줄때까지 졸라대겠습니까? 지금 굶주림에 처해 죽게 될 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뭔가 죽을 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뻔뻔해질 수밖에 없고, 부끄러움을 전혀 게의치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비유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친구 간에도 그렇게 부끄러움이나 뻔뻔스러움도 다 잊어버린 채 간청하듯이,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바 아버지’로 모시고 의지한다면 때로는 그렇게 부끄러움도 개의치 말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나님께 메달릴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죠.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용기를 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비유의 말씀을 9-10절을 통해 다시금 요약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과 같다는 격입니다.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원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어린 자식은 부모에게 체면도 없고, 오히려 뭔가 맡겨 놓았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요구하지 않습니까?

함께 공부하는 목사님이 옛날에 영어 사전을 하나 살려고 부모님께 책값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빠 컨사이스 사야 해요. 돈 주세요.’ 또 한 번은 ‘엄마 딕셔너리 사야 해요 돈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아빠 엄마 영어 사전 사야 해요. 돈 주세요.’ 그렇게 뻔뻔스럽게 요구했다고 하죠.

물론 그렇게 뻔뻔하라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꼴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그 자식의 심정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마음과 자세로, 뻔뻔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그렇게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라는 것이 모두 현재 시재의 동사입니다. 그것은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뜻이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 말입니다. 배고플 때 벗에게 계속 간청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도 그렇게 지속성을 갖고 하나님께 매달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끄러움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심정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신다고 하십니까?

본문 11-1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세상 어떤 아버지든지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할 때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알을 달라고 할 때 전갈을 줄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죠. 모두가 제 자식들만큼은, 심지어 그 자식이 악할지라도, 그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자,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가장 귀한 선물이요, 가장 귀한 응답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좀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너희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위해, 뻔뻔스럽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실은 물질보다도, 구하는 자들이 만족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인격적입니다. 성령은 모든 물질을 주도하시고 또 영적인 부분을 주도하시죠. 성령은 내가 원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이끌어주시고, 또 뒤틀린 관계의 복원도 주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만큼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것이죠. 그만큼 내가 원하는 바를 성령님은 얼마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기에, 성령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 그리고 친구를 향해 먹을 것을 간청하듯이 하나님께 ‘간청하듯이 기도하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그런 말씀들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철저히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왕권을 높이고, 아빠 아버지되시는 그 자녀로서 간구하며 나아가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해 그만큼 친밀감을 가지고, 그 분이 가장 좋은 것, 가장 좋은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심을 나타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큰 문제도 문제로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큰 문제보다 더욱 크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게 그 크신 하나님을 친밀하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어찌 성령 안에서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오늘도 그런 은혜의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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