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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요나의 표적밖에 (눅11:29-54)

by 똑똑이채널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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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죠. 특별히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 곧 마귀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기에, 악한 영들이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자기 하수인처럼 사용하려고 하죠. 그런데 그런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느냐 있죠.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는 구원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본심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실은 그때부터가 더욱 중요하다고 했죠. 그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 심령을 채워나가야만 더 강력한 악한 세력들이 틈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죠. 깨끗이 청소된 집과 같은 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더욱 센 악한 세력들이 다시금 침투해 들어온다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29절입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해 주셨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앞선 내용 중에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벙어리 귀신을 내 쫓았을 때, 사람들이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그 약한 귀신을 내 좇아냈따고 수군거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또 다른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또 다른 표적을 내 보여보라”고 예수님을 압박하기도 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이 귀신을 내좇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서로 분쟁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 것이요, 그 이후 깨끗이 청소된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채워넣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죠.

그런 다음에 하신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표적을 구하지만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읍 곧 지금의 이라크 지역으로 가서,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하나님의 심판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했을 때, 요나가 그 백성들이 얄밉기 때문에 불순종하여 욥바를 거쳐 다시스 곧 지금의 스페인 쪽으로 달아나려 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큰 풍랑을 일으켰고, 고기를 준비해서 요나를 집어 삼키게 하셔서, 삼일 밤낮 그 고기 배 속에서 회개하게 한 다음에, 다시금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하신 일이, 요나서에 기록이 돼 있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기 배 속에서 3일밤낮 지냈다가 다시금 살아난 것 말입니다. 그 표적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사흘 째 되는 새벽 미명이 다시금 살아날 그 표적을 빗대어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수많은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갖가지 기적과 표적을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표적들을 얼마든지 원하면 보여줄 수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표적, 표적 중의 가장 최고의 표적은, 기적 중에 가장 최고의 기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본문 33절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등불을 존재 목적이 빛을 비추는 데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등경 위에 둔다고 말씀하고 있죠.

그리고 34절에서는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춰서 온전히 밝을 것이라”고 말씀하죠. 결국 그 등불의 빛이란 우리 심령을 밝게 비추는 성령의 조명을 뜻하기도 하고, 그 말씀의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이 세상의 어떤 표적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표적을 그 심령 속에 모시고 사는 자는 진정으로 밝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고 표적을 행해도 그 심령 속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모셔들이지 않으면 실은 그 영혼이 온통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시는 말씀이죠.

 

이제 본문 37-44절까지는 바리새인과의 나눈 주님의 대화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을 주제로 나눈 내용입니까?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함께 점심을 잡수시는데, 주님께서 손을 씻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이 이상스레 여기는 모습이었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리 겉을 깨끗이 씻는다 한들, 속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뜻이죠.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한 등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등불이 켜져 있으면 무용지물과 같은 격이라는 뜻이죠. 아무리 그 심령이 겉은 그럴듯한 크리스천 같아도 그 속에 탐심과 정욕과 자기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42절을 통해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런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하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곧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그 십일조는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는 것 같은데, 사람에 대한 공의로운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듯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 자비로운 마음은 상실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외식하는 자라고 욕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두 가지 것을 잘 행하라고 주님께서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45-54절의 말씀은 율법교사와 주님간의 대화 내용입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율법교사들은 남은 가르치기는 잘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에 비춰보자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순종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속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2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이것이 곧 지도자들, 율법교사들, 선생들,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칭하는 말씀이요, 가정의 부모들에게도 칭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제자들 앞에서, 교우들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살라는 주문이죠. 그래야 너희들도 천국에 들어가고, 제자들도, 교우들도, 자녀들도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 어떤 표적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장 귀한 표적 중의 표적으로 삼고, 그런 빛 가운데 거하는 심령이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좇아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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