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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구제하여(눅12:13-34)

by 똑똑이채널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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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의 형과 나누는 유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나누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죠. 형이 욕심을 부려서 동생에게 나누어 줘야 할 부분까지도 독차지했는지, 아니면 동생이 자기 몫에 만족할 수 없어서 조금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산 분배 문제로 형제간에 분쟁이 생겼다는 점이죠.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14절에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 편을 편들어주는 것도 거절하신다는 뜻입니다. 다만 15절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관점을 드러내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부요함’에 대한 윤리적인 잣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한 사람이 풍요로움을 얻는 것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가 중심이죠.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게 되었고, 그는 그 수확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부도덕하게 자신의 수확을 거둬들였다고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풍년의 해를 만났고, 그 수확물을 저장하기 위해 창고를 더 확장하기로 결정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의 어리석음은 그의 부요함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있었던 것이죠.

 

본문 17-19절을 보면 그의 관점이 나옵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내가’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말이죠. 그는 자신의 풍성함을 결코 이웃과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를 위해서만 갖고 있을 요량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편안하게 누리며 지내는 것이었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외에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책임감도 긍휼함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탐심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생각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 탐심인 줄 생각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쌓아뒀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십디다.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염려 할 필요가 없죠. 그만큼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이 돌보심에 대해 의심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금가게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까마귀’와 ‘백합화’ 그리고 ‘들풀’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그토록 기르시고 입히시고 돌보실진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인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하게 돌보고 가꾸어주시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탁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죠. .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그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 근심하지 말고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모든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더하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이고요.

그러면,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셨을까요? 그에 대한 단서는 연이어 나오는 말씀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고, 이어서 구제와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적어도 오늘 본문 속에서는 어떤 하늘위의 영적인 고상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통로로서 그것을 이 땅에 펼쳐가는 삶을 뜻합니다. 그러한 삶은 곧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하여 연대와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 낮고 낮은 이 땅에 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책임의식, 그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 자비와 사랑의 통로가 되는 삶이며, 이는 곧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삶, 그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삶을 말합니다.

32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그 일을 하도록 위로하며 격려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 그리고 재물에 대한 탐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결핍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우리의 이웃에 대해 자비를 베풀라고 격려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33a)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앞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는 달리 재물에 대한 탐심, ‘삶의 결핍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한 연대와 책임의식을 가지고 긍휼과 자비의 삶을 더욱 온전히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을 마무리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주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방향을 되돌려 반대방향으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실은 보물이 있으며, 나아가 우리 마음의 표현인 그 보물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이웃을 구제하는 긍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하며, 그 구제는 곧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현재와 미래의 ‘결핍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역방향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마치 우리가 천국에서 상급을 얻기 위해 구제하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선행을 하고 구제하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말씀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하는 말씀입니다. 구제는 구제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구제의 대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제행위보다 구제의 대상이 소중하기 때문에 구제가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은 주님에게는 당신 자신의 생명보다 우리의 생명이 더 소중하였기 때문이었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보물은 우리의 구제의 행위로 인해 주어질 저 세상에서의 어떤 이득, 어떤 상급보다도, 실은 지금 내 곁에 구제대상이 있어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었다는 그 자체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삶을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게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저 멀리에 있는 게 아니라 의외로 우리 곁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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