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회칠한 무덤, 곧 손을 씻지 않는 것을 가지고 책잡으려 하는 그들에게 겉모습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처럼 하지 말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진실된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율법교사들을 향해 남을 가르치기는 잘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거나, 지옥으로 이끄는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경계하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도 다른 사람 앞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복음의 거울로 산다면, 그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영적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의 메시지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사람들이 서로 밟힐 만큼 수만 명이 모였을 때 예수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1절을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죠. 여기서 ‘외식’이란 겉만 보기 좋게 꾸며 내는 일을 말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꾸며 내는 것 말이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실제로는 경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여서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죠.
물론 우리 사람이란 자기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이 혼자만 있게 되면 긴장도 풀리게 되고 행동에 빈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죄의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2절과 3절을 보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있고 또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링컨이 말을 했죠. 그처럼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선비들도 신독(愼獨)이라 하여 남이 없고 자기 혼자만 있을 때도 몸과 마음가짐을 더욱 조심하기도 했고, 종교 개혁자 칼빈도 “코람 데오(Coram Deo)”를 자기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그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늘 서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네 옆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진실되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길거리를 가다보면 CCTV가 우리를 보고 있지만, 그것도 군데군데 주로 사각지대에만 있고 때론 고장이 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CCTV는 HD 고화질로 고장도 없이 1년 365일 밤낮으로 언제나 돌아가며 우리를 찍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몰래 하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인지 그 자체가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0편 4절을 보면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남 몰래 하는 일들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기간들은 하나님께서 참으시며 조용히 기다려주시는 시간들입니다. 그러나 그 정한 시간이 지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들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은 금방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5절을 보면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6절과 7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하고 말이죠.
원래는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인데 두 앗사리온을 사면 한 마리를 덤으로 준다는 말입니다. 덤으로 거저 줄 만큼 지극히 작은 참새까지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의 머리털은 금발이 평균 14만개이고 흑갈색은 평균 12만개 정도 된다고 하죠. 그처럼 하찮은 우리의 머리털 숫자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의탁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보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감정이 예민한 사춘기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다 길거리에서 아버지를 만나도 혹은 어머니를 만나도 일부러 못 본척하며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거나, 일부러 딴 길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게 실은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남들 앞에서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서 그런 것이라면 어머니 입장에서는 마음이 참 아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종이 주인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남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기도를 하는 것이 좀 쑥스러워서 기도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작은 예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더욱 참된 신앙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과 11절을 보면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도 신앙으로 인한 박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지금은 공개적인 박해와 핍박의 시대는 아닙니다. 대신에 신앙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는다던지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인해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나 불이익과 따돌림을 받을 때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파라클레토스, 즉 우리 옆에 서서 친히 도와주시는 분이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 옆에 서서 친히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의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사람이 있든 없든, 늘 코람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의식, 신전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눅12:35-59) (1) | 2024.03.28 |
---|---|
구제하여(눅12:13-34) (0) | 2024.03.26 |
요나의 표적밖에 (눅11:29-54) (0) | 2024.03.26 |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눅11:14-28) (0) | 2024.03.24 |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5-13) (0) | 2024.03.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