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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가 있었죠. 또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친구가 친구에게 먹을 것을 간청하듯이 너희들도 하나님께 때로는 부끄러움을 모르듯이 뻔뻔하게 ‘간청하듯이 기도하라’고 하셨죠. 그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최종적인 의도가 있었죠. 우리의 기도가 철저히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 곧 하나님의 왕권을 높여드리는 기도의 마음가짐이 중요하고, 또한 아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라는 것이었죠. 그렇게 친밀감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되심을 나타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닥쳐오는 문제도 문제로 보지 않게 될 것이요, 그 문제보다도 더욱 크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친밀한 관계를 더욱더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빠 아버지 앞에서 누리는 가장 귀한 기도의 복이죠.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 쫓는 모습을 보고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내 좇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을 하게 되었죠. 그러자 주위에 있던 수많은 무리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죠.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이들은 그 일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그 귀신을 좇아낸 것이라고 수군거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란 히브리어의 ‘바알’(בַּעַל)과 ‘쩨부브’(זְבוּב)의 합성어인데 ‘바알의 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본래 ‘바알’은 가나안의 신이었죠. 풍요와 번영의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내좇았을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 것이라고 수군거린 것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기적을 놓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좇아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본문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증언해주고 있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왜 어떤 이들이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나섰겠습니까?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 즉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 쫓은 것을 두고서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무리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들과 동조하는 격이죠. 만일 그런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귀신을 좇아낸 게 아니라면, 또 다른 표적을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해 보라는 것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17-19절 말씀이 그것이죠. 과연 귀신이 귀신을 내 좇아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가 설 자리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무당이 굿을 하거나 무당이 귀신을 좇아내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픈 치레를 하는 사람이 나은 것 같고, 더 용한 무당이 굿을 할 때 작은 귀신들이 다 떠나가는 것 같아, 이제 그 사람도 괜찮은 것 같은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을 바르게 알려주는 말씀이 본문 24-26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무당이 굿을 하고 더 능력있는 무당이 더 쌘 귀신으로 약한 귀신을 물리친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깨끗케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그렇게 보일 뿐, 오히려 더 강력한 귀신들을 불러들이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귀신의 세계, 악한 사탄의 지배력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말끔히 정리되고 정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20-22절 말씀에서 밝혀줍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그때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귀신의 세력들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셔들이면 모두가 굴복당하여 떠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본문 27-28절을 통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2천년 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에 귀신 들린 자가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 분을 마음 속에 영접할 때, 어떤 강력한 귀신도 다 떠나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쉽게 떠나가지 않는다면 떠나갈때까지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청하는 자세로’ 그리고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항하는 자세로 끝까지 영적으로 싸워나가야 하겠죠.
만일 그렇게 해서 악한 귀신의 세력들이 떠나갔을 때, 과연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의 심령을 쥐어잡고 있던 귀신이 떠나가면 깨끗하게 청소된 상태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 이후를 더 소중하게 가꿔나가야 한다는 것을 지금 우회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 못하는 귀신을 좇아낸 것을 두고서 예수님을 향해 당신을 밴 태와 젖을 먹인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고 말씀하셨죠. 바로 그 점입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그 심령이 이제 청소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말씀을 새겨서 심령에 채워넣어야 하고, 그리고 그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단계를 밟아가야, 더 강력한 귀신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다시금 귀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몇 달 전에도 그런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무당 엄마 목사 아들〉이란 그 책에서 엄마는 맨 발로 작두를 탄 무당이었고, 아들은 나중에 목사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 아들이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중보하고 또 그 엄마가 있는 지역의 목사님들이 전도를 하면서 그 엄마를 찾아가면서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내용이죠. 그래서 그 엄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심령으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그 때 이후에도 영적인 것들이 보이고, 이전처럼 사람들의 앞날이 보이더라는 것이죠.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그 분에게 간증을 해 달라는 요청도 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들이, 절대로 옛날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도 말고, 또 어디 가서 그렇게 간증하고 또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려고 하지 말고, 오직 말씀을 엄마의 심령을 채워야 한다고, 아주 귀한 이야기를 해 준 내용이 나옵니다. 왜죠? 귀신이 떠나간 심령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만 그 심령이 굳건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귀신에 붙잡힌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며 살아가야, 그 세력들에 강력하게 대항하며, 굳게 설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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