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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2024년 2월 12일 미국 휴스턴 남서부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죠.
그 교회는 〈긍정의 힘〉으로 널리 알려진 조엘 오스틴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매주 약 4만5000명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벌어진 일이죠.
그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36세의 모레노라는 여성으로 알려 있습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글귀가 적힌 소총을 들고 무차별 난사를 벌인 것이었죠.
수사 당국은 아마도 그녀가 가정 불화와 정신질환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로 그 일을 주도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깨달음)그런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왜 하필 그런 대형교회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 걸까?
긍정의 힘으로 인간의 위대한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데 거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경종을 울리는 것 아닌가?
지금 이스라엘 땅은 본래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땅인데 점차 빼앗겨서 분풀하는 식으로 총을 쏴 댄 것 아닌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일을 보면서 여러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레노라는 여성의 속 마음을 모르는 우리는 결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죠.
더욱이 그런 일을 겪은 레이크우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죠.
(적용)인간 세상에 일어난 일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게 되면 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되죠.
한나라는 여인이 본처였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후처 브닌나에게 수모를 당할 때 누가 그 처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한나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면서 기도했죠.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그녀가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함부로 판단했죠.
‘왜 술에 취해서 여기에서 울고 불고 하는 것이냐?’하고 말이죠.
그것은 한나가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자신의 통사정을 주님 앞에 간절히 호소한 것이었죠.
만일 엘리 제사장이 영이 흐르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텐데 이미 그의 영이 혼미한 상태로 접어들었죠.
그 때문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에 손을 댈 때도, 법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 과시할 때도 말리거나 질책하지 못한 것이었죠.
그러니 한나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는 속중심을 헤아리기보다 겉으로 판단하며 말한 것이었죠.
그로 인해 한나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엘리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사람을 판단할 기준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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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툼과 분열을 일삼기보다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장 18절부터 계속 써내려왔죠.
지난 시간에 살펴본 고린도전서 4장은 복음 사역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설명해 줬습니다.
복음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일꾼’이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ὑπηρέτης)인데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subordinate rower)와 같죠.
복음구조선의 선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자들이 복음사역자란 뜻입니다.
그리고 또 있었죠.
복음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이죠.
‘맡은 자’란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로서 집안의 행정과 재정을 관리하는 관리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죠.
그만큼 복음사역자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이자 하나님나라의 영적인 권위를 지닌 청지기라는 뜻입니다.
(깨달음)물론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게 본래 의미라면서 함부로 대하거나 종처럼 부려서는 안 되겠죠.
또 영적인 권위자라면서 제왕처럼 행세하려고 해서도 안되겠죠.
모든 복음사역자들은 주님을 위한 종이요 교회의 영적 청지기로서 양을 먹이고 치고 돌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직무죠.
그를 위해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자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만큼 복음사역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을 바울이 강조했습니다.
‘충성’(忠誠)을 파자하면 ‘충’이 ‘가운데 중’에 ‘마음 심자’, ‘성’은 ‘말씀 언’변에 ‘이룰 성’자죠.
충성은 온 마음 중심을 다해서 말씀을 받들고 말씀을 이루어가는 것이죠.
복음사역자들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말씀인데 본문 3-4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원해)여기에 ‘판단받는다’는 헬라어로 ‘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입니다.
‘자세히 조사하다’ ‘엄격하게 심판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조사받고 심판받는 일은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조사하고 판단하는 일이 왜 매우 작은 일일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매우 작은 일’이란 헬라어로 ‘엘라키스토스(ἐλάχιστος)’인데 ‘가장 작다’(smallest least)는 최상급입니다.
바울은 교인이나 타인에게 판단받는 것이 매우 작은 일 곧 너무너무 하찮은 문제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사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외모도 형편없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많았구요.
극심한 안질을 앓고 있었으니 좋아할 사람도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조사나 엄격한 판단조차 사소한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불완전한 판단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성찰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책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바울은 자기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말하기도 했고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롬7장)고도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스스로 자책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양심에 비춰 아첨하거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복음사역자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자기 자신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왜죠?
복음사역자로 일한 것이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자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모든 일에 대해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하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적용)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남을 판단하는 잘못에 빠져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은사를 받아서 잘 난 체 하고, 누가 방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를 하고 누가 예언을 하는데, 서로가 잘 자났다고 하고 또 서로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죠.
더욱이 복음사역자들중에 바울이 잘 났다고 하고 아볼로가 잘났다고 하고 베드로가 잘 났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판단은 사람의 판단이요 사람의 기준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에 대한 판단, 사람에 대한 행위의 판단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상급의 심판대 앞에서 그 행위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인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것인지 다 드러난다고 말했기 때문이죠(고전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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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그래서 바울은 본문 5절을 통해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원성)이 말씀은 시편 139편 11-12절 말씀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원해)여기에 ‘드러내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티조(φωτίζω)’는 ‘빛’(light)을 뜻하는 ‘포스(φῶς)’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포티조’는 ‘빛을 비추다’, ‘드러내다’는 미래형입니다.
헬라어에서 미래형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미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사물들이 빛을 받아 그 실체가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나타내시리니’로 번역된 ‘파네로오(φανερό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미래형으로 빛을 비춤으로 모든 마음의 경영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사람들의 감춰진 행위뿐만 아니라 그 마음속까지 품은 것들조차 완전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렇기에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복음사역자들이 주님의 일꾼이요 복음을 맡은 자로 충성하는데 그걸 두고 성도나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있지만 그걸 너무 크게 생각해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날에 충성을 다했는지 딴전을 피웠는지 그 속마음까지 다 감찰하시고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도 자신을 향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 모든 것들이 만천하에 드러날 그 판단을 더 중히 여기며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죠.
(적용)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가?
다른 사람이 내 눈에 차지 않고 부족해 보여도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 맡기고 사람을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가리켜 철학에서는 ‘에포케(εποχη)’라고 말을 하는데 일명 ‘판단중지(判斷中止)’라는 뜻입니다.
어떤 현상에 대해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때까지 모르는 일정 부분에 대해서 괄호를 치고 판단중지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죠.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가 잘 났고 은사가 더 출중하다고 판단하고 비난하는 모든 것들을 판단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부분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리스도의 상급의 심판대 앞에서 만 천하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죠.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한나도 마찬가지고,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다고 비난한 미리암도 마찬가지죠.
출애굽기 2장 21절을 보면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살 때 십보라와 혼인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 모세가 광야 행진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는데 과연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할 여력이 있었을까요?
칠십인역(LXX)에서는 ‘구스’(כּוּשִׁית)를 ‘에티오피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타르굼 역(Targum)에서는 ‘구스’를 ‘아름답다’로 번역하고 있죠.
그만큼 ‘구스’라는 말은 십보라의 정체성을 밝힌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들을 종합하면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모세가 미디안에 양치기를 하면서 십보라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름다움은 마치 모든 백인 중에 한 명의 흑인이 또렷이 드러나듯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미리암이 나서서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다고 비방한 것은 모세를 그만큼 육적인 사람으로 치부하고자 했다는 뜻이죠.
그런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자신들이라고 듣지 못하겠느냐 하면서, 자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모세를 비방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차원에서 자신이나 타인이나 고린도교회내에서 함부로 사람에 대해 복음사역자들에 대해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에 깃들 수 있고 그것이 자칫 죄와 탐욕을 부추기는 꼴이 될 수 있으니 말이죠.
궁극적으로 그런 일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요 교회와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교회를 허물어트리는 간계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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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성도나 다른 사람을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주님앞에 선 자세로 겸손하게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미국의 대형교회에서 총기난사가 발생했을 때 함부로 그 일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것 아니겠느냐?”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 통곡하고 흐느끼며 울고 기도할 때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엘리는 술취한 것으로 판단해버리지 않았더냐?”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서로가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바울은 판단중지를 요청한 것 아니더냐?”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나 그 어떤 복음사역자들도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판단하실 이는 재림의 주님이요 그리스도의 심판대 심판장이신 주님께 있으니 말이다.”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다고 미리암이 판단하고 정죄하며 뜬소문을 퍼트린 것도 그녀의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이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동안 네 눈에 차지 않고 네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절대로 멈춰야 되는 걸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 대한 판단은 다 자기 만족과 자기 기준에 의한 것이요 그런 기준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겠느냐?”
“그 사람의 속 사정과 생각과 그 모든 행위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남을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다 사라질지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 아니더냐?”
“그러니 모든 감춘 것까지 주님의 빛 속에 드러날 것이니 너는 너에게 주어진 사역에 온전히 충성을 다했으면 좋겠구나.”
(찬양)그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뜻이니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범사에 감사하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 몸과 영혼이
주 오실 그 날에 흠 없기 원하노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뜻이니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범사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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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다 연약한 존재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다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감싸주신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바라볼 때 누가 감히 자신의 잘 난 것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판단과 정죄는 다 상대적인 것이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의 상급의 심판대 앞에서 그 모든 행위가 온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매일 겸손하게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어떤 일이든지 주님을 위한 충성스런 자세로 그 직임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을 많이 만들기를 좋아하고 퍼트리기를 좋아하는데 마귀도 교회 안에 그런 일을 많이 많들어 교회를 허물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런 데 속아 넘어갈 게 아니라 스스로 겸손하게 오직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고 그날 불타지 않을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상급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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