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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예루살렘에 가면 황금사원이 있습니다.
황금처럼 노란 동으로 지붕을 씌운 사원이라 ‘황금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 사원을 이슬람 곧 회교도들은 ‘알 아크사 사원’이라고 부릅니다.
‘알 아크사’란 뜻은 ‘가장 오래된 사원’이란 뜻입니다.
회교도들은 본래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그곳을 점령해서 A.D.715년에 그 사원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실은 바위 사원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고 맨바닥에 큰 돌멩이가 하나 있는 것이죠.
그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바위에서 이슬람교를 만든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 아크사 사원은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원이 된 것이죠.
(깨달음)그런데 예수님은 헤롯 성전을 향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46년간 증축한 그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막13:2, 마24:6, 눅21:6)고 말씀하셨죠.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성전을 삼일만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셨는데 성전된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셨죠.
그런데 주님의 말씀 그대로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쳐들어왔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알 아크사 사원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그 자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그 자리에 회교도들이 다시 지은 것입니다.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하는 그 바닥에 말이죠.
회교도들은 그곳을 신성시하면서 절대로 그곳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넘겨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만의 성지요 그들만의 신성한 건물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이 그곳을 점령하면서 서쪽 아래에 있는 성전의 벽 일부는 남겨 놓았습니다.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그 벽이죠.
저도 그 벽에서 기도를 했는데 유대이들은 그 통곡의 벽에서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제 3 성전을 짓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적용)하지만 이슬람교도든지 유대인이든지 그들이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46년간 증축한 그 성전보다도 당신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세워야 할 성전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몸으로서의 성전인 것이죠.
그들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야 하고 그들의 몸에 성령을 모시는 성전으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것을 놓친 채 아무리 성전을 짓고자 한다 한들 건물로서의 성전은 늘 전쟁으로 불러오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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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은 다툼과 분열이 생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은사를 최고라 주장하는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이 분란을 일으키는데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길 바란 것이죠.
그래서 바울 자신도 고린도교회를 심고 세운 사람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일꾼이라고 스스로 칭한 것이었죠.
일꾼이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하는 심부름꾼이요 주님의 사환이라는 뜻이죠.
그만큼 자기 공적이나 자가 자랑이 있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울도 그렇고 아볼로도 그렇고 게바 곧 베드로도 그렇다는 뜻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나눈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게 무엇이었습니까?
다들 자기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지만 분명코 남은 공적에 따라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었죠.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신실한 마음과 충성스런 헌신을 통한 공적은 불에 타지 않고 남는 것들이죠.
하지만 나무와 풀과 짚은 불이 날 때 다 타버리고 사라지는 것들이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과시와 자랑거리를 위해 자신을 세우는 자들이 심판날에 그렇게 다 사라지고 없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신실한 마음과 충성스런 헌신을 행한 자들은 그 심판의 날에 상급을 받는다고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를 맺고 돌에 맞아 죽음에 처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한 것도 주님께 받을 상급을 바라봤기 때문이죠.
주님께서 주시는 그 상급은 이 땅에 왕이나 대통령이 주는 상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급이죠.
(깨달음)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날 주님께서 베푸실 상급을 바라보며 신실한 마음과 충성스런 헌신을 다할 수 있기 바랍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내가 맡은 달란트가 작을 지라도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절대적인 상급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본문)오늘은 성전에 관한 말씀인데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몸으로서의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헬라어 원문은 ‘에이도 오우’(εἴδω οὐ)라는 말이 맨 먼저 나옵니다.
‘알지 못하느뇨?’는 말이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하고 말하고 있는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지금 고린도교회가 분열이 났고 대립이 일어나 싸움이 벌어진 상태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뇨?’하고 말하는 것이죠.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정말 알고 있느냐? 그걸 안다면 지금 다투고 싸울 수 있겠느냐?’하는 뜻이죠.
그만큼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원해)신약성경에 ‘성전’이란 헬라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헤이론’(ἱερόν)인데 성전의 지역과 관련된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오스’(ναός)인데 성전의 지역 내에 가장 작은 지성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단어는 ‘나오스’입니다.
본래 예루살렘 성전은 3천 년 전 솔로몬이 7년 동안 걸쳐 지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규모도 컸고 안팎을 금으로 쌌기 때문에 햇볕이 비치면 휘황찬란했죠.
하지만 그 성전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대왕이 침공할 때 다 무너지고 훼파됐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페르시아가 장악할 때 고레스 대왕이 그들을 귀환시켜줬죠.
그때 돌아온 포로귀환자들이 행한 일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죠.
그 후 이두매 사람인 헤롯 대왕이 유대의 분봉왕이 됐을 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성전을 증축했는데 46년간 지었죠.
그 길이가 가로 500m 세로 300m요 성소의 본체는 가로 180m 세로 120m 성소의 높이는 45.6m, 길이가 18m죠.
휘장 길이만 9m인데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들어가는 곳입니다.
바로 그 지성소가 ‘나오스’입니다.
그 지성소와 관련된 성전의 큰 뜰이나 여인의 뜰 그리고 성전 벽까지 모두 ‘히에론’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 뜰과 벽들이 ‘히에론’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성소 곧 ‘나오스’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이 ‘나오스’라는 동사는 ‘나이오’라는 ‘거주하다’(dwell)는 원형 동사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깨달음)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성소라는 나오스에 거주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머지 건물과 장소도 거룩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지 않으면 다른 건물과 장소는 일반 성곽과 다를 바 없는 건물이 되는 것이죠.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할 때 바로 ‘나오스’를 썼습니다.
그 말은 ‘너희가 지성소인 것을 알지 못하느뇨?’하는 뜻입니다.
지성소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너희가 ‘나오스’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신 것을 알지 못하냐는, 하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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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해2)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이라 할 때 ‘너희 안에’란 헬라어로 ‘엔 휘민’(ἐν ὑμῖν)입니다.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너희 모두 가운데’라는 뜻과 ‘너희 각자 안에’라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너희 모두 가운데 성령이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너희 각자가 조화와 일치를 이루며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돼야 한다는 거죠.
그만큼 우리 모두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우리의 주인이신 성령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지성소이기에 우리의 삶으로 성전다움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죠.
(원성)요한복음 2장 19-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해서 유대인들과 나눈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깨달음)예수님은 그들이 우상시하던 성전을 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은 헤롯이 46년간 지은 걸 어떻게 삼일만에 일으키겠다고 하는 것인지, 성전을 모독했다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햐죠.
예수님께서는 그때 건물로 지은 성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전된 자기 자신의 몸을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당신의 몸을 말씀한 것이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의 성전 되심이 바로 육체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갖고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모든 표준과 모범이 그분의 육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내 육체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왜냐하면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하나님의 영을 내 몸으로 진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죠.
(본문2)오늘 본문 17절은 더욱더 중요한 말씀인데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깨달음)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죠? 하나님의 성전된 그 몸을 더럽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성)레위기 15장 31절의 표준새번역 말씀이 이렇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여라.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을 부정하게 하였다가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민수기 19장 20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부정을 탄 사람이, 그 부정을 씻어 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총회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의 위에 뿌리지 아니하여 그 더러움을 씻지 못하면, 주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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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부정한 사람, 성막을 더럽힌 사람, 성소를 더럽힌 사람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내치라는 명령은 사형보다 더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에서 출당조치를 받게 되면 모든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죠.
성소를 더럽힌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7절을 마지막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도 그러하니라”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아, 너희도 하나님의 성전처럼 거룩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이 ‘너희들 알지 못하느냐?’하는 그 말이 우리의 귓전에 때리고 있지 않습니까?
(적용)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성형을 잘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조차도 강남에 와서 성형을 하고 가죠.
배우들도 드라마가 하나 끝나면 얼굴이 많이 달라져서 등장하죠.
어떤 배우는 코를 계속 잘 못 세우다가 이제는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골때리는 그녀들’에 나오는 어느 배우가 스스로 고백을 한 바 있죠.
박경림 씨도 한 때 성형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형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죠.
성형을 하는 건 사람들이 보기 좋게 하는 것인데 그래도 보기 싫으면 계속해야 하고 그러다 몇 번을 고쳐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 보기 좋기 내 얼굴을 고칠까, 아니면 사람들이 내 얼굴을 좋아하도록 만들 것인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고 하죠.
사람의 외모보다도 그 속에 깃든 얼을 바르게 세우면 얼꼴은 아주 아름답고 선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그런데 마음은 고치지 않고 외모만 뜯어고치면 결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서 8장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말씀을 좇아 살 때 얼굴에 형체가 날 뿐만 아니라 사나운 게 변한다는 거죠.
내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보여줄 때 내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사나운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성전된 우리의 몸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삶이 내 삶에 드러날 때 참된 성전이 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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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성령을 모신 성전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얼꼴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러운 것 아니더냐?”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들 말이다.”
“그런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않고 얼굴만 뜯어고치려고 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건물로서의 성전은 무너졌지만 당신의 몸이 성전이요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을 모신 자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지 않더냐?”
“너희가 성령을 모신 자답게 너희 삶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아무리 얼굴을 뜯어 고친다 한들 그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들어있지 않으면 어찌 성령의 사람일 수 있겠느냐?”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고자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한다 한들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오는 일밖에 더 되겠느냐?”
“유대인들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심령에 성령을 모시야 그들의 성전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오늘을 사는 너도 너의 심령에 헛된 철학이나 속임수에 지배당하지 말고 오직 말씀을 품은 얼꼴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리하여 2024년 한 해 동안 네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심과 온전하심을 드러내는 참된 성전의 삶을 살기를 주님께서 기뻐하실테니 말이다.”
(찬양)허무한 시절 지날 때 깊은 한숨 내쉴 때 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리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억눌린 자 갇힌 자 자유함이 없는 자 피난처가 되시는 성령님 계시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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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그 심령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줄 믿습니다.
김칫독을 된장독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김칫독의 모든 것들을 다 빼내야 된장을 담글 수 있죠.
나의 욕심과 탐욕과 헛된 철학과 속임수를 가득 담고 살던 것들을 다 빼내고 우리 심령에 성령님을 모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2024년 우리가 걸어다니는 성전이 되어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삶속에 드러낼 수 있기 바랍니다.
그 삶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요, 그렇게 성전된 자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빛의 열매를 맺는 한 해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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