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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전4:6-8)

by 똑똑이채널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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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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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총선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끌벅쩍합니다.

공천에서 탈락한 분은 탈당하기도 하고 또 무소속으로 나오려고 하죠.

 

여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은 대통령의 의중도 봐야 하고 이전에 오래도록 국회의원으로 일한 분의 눈치도 봐야 하죠.

그것은 야당의 공천관리위원장도 마찬가지죠.

 

중요한 것은 먼저된 자가 참된 본을 보이는 것이죠.

그래야 그 직책을 이어받는 자가 바른 지도자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는 그만큼 바른 본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깨달음)이것은 신앙생활의 원리도 마찬가지죠.

앞선 믿음의 선배가 신앙의 참된 본을 보여주면 뒤를 따르는 성도들도 잘 배우고 그대로 행하게 되죠.

하지만 설익은 과실은 먼저 떨어지고 과실의 맛도 형편없듯이 신앙인이 성숙하지 못하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죠.

 

그래서 12제자 중에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보선할 때 맛디아를 뽑은 기준도 그것이었죠.

예수님과 제자들과 늘 함께 동행한 자,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여 그 증인이 될 자였죠.

주님의 제자들도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런 기간이 필요했음에도 완숙하거나 성숙하지 못했죠.

하물며 새로운 제자군에 들어가는 사람은 더더욱 성숙한 시간과 그 과정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이것은 예수님께서 만 왕의 왕이 되신 것도 같은 원리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죽음이 없이 어찌 왕이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 없는 왕관은 없고 피흘림이 없는 축복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고난과 인내 없이 갑자기 영적으로 뭔가 된 줄로 생각하면 교만하기 짝이 없게 되죠.

아주 짧은 기간에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교만해지는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에도 연단과 인내를 통해 한 층 성숙해지는 것이죠.

그때 비로소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온전히 고백하며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본을 보여주는 믿음의 선배가 많은 교회는 나중된 자들도 그 본을 좇아 신실하게 신앙생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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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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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툼과 분열을 일삼기보다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장 18절부터 계속 써내려왔죠.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교인이나 타인에게 판단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겼다는 것이었죠.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불완전한 판단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성찰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고 산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자기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말하기도 했고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롬7장)고도 고백한 바 있죠.

그만큼 자신이 복음사역자로 사는 것은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자아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뜻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죠.

복음사역자들이 주님의 일꾼이요 복음을 맡은 자로 충성하는데 그걸 두고 성도나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있지만 그걸로 위축되거나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날 충성을 다했는지 딴전을 피웠는지 속마음까지 감찰하시고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니 그분의 판단을 더 중히 여기며 충성을 다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6절부터 13절까지는 스스로 왕 노릇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복음을 위해 고난받은 사도들을 대조해서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그 전반부인 6-8절까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원해)여기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다’하고 바울이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본을 보였다’는 헬라어 ‘메타스케마티조’(μετασχηματίζω)는 ‘모양을 변형시키다’(to change the figure of)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을 통해 이 단어를 총 3번 사용했는데 거짓 사도들과 사탄에 대해 사용한 바 있습니다.

또 빌립보서 3장 21절을 통해서도 사용한 바 있는데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죠.

그만큼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사도들을 대조해서 밝혀주는 단어입니다.

이른바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경쟁이나 적대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동반자관계로 살아왔고 그 본을 보여주지 않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뜻이죠.

 

(원해2)“기록된 말씀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도 그런 차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부터 지금까지 기록한 모든 교훈들도 말씀을 넘어서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르게 세우고자 교훈한 것들도 모두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제시한 교훈들이었죠(고전1:19,31 고전2:9, 고전3:19-20).

그런 교훈들을 떠나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교만하고 자기 자아를 좇아 사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그렇게 산 적이 있더냐, 결코 그런 본을 보여준 적이 없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깨달음)그래서 7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받은 지혜나 지식이나 은사가 실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신 은혜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도 그것으로 우월감을 삼아 다른 사람을 차별화하고 무시하고 파당을 짓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이냐, 하는 뜻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그런 본을 보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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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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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이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이도 그만큼 그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바울이나 아볼로는 참으로 보기 드문 훌륭한 사역자들이요 영적인 스승들이죠.

또한 하나님의 일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협력의 본을 보인 분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전적으로 배우는 이들의 영적인 미성숙과 부족함과 교만함과 허영심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으로부터 아름다운 모범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오히려 서로를 내세우고 다투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 신앙과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자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자의 자세는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배우는 자의 마음과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기대와는 전혀 어긋난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설교와 말씀으로부터 은혜를 얻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교자의 연구와 기도가 부족하다고 탓하지 말고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묵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자의 음성을 단순히 사람의 말로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너무너무 중요하죠.

그렇게 할 때 똑같은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들을 수 있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케 되는 것이죠.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711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그랬지만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더더욱 말씀을 사모하며 성경을 상고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전할 때 아멘 아멘 하며 순전한 믿음의 자세로 받들이여 그 본을 따르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과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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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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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말씀이 8절인데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원해)여기서 ‘배부르다’는 헬라어 ‘코레뉴미(κορέννυμι)’는 ‘만족하다’(satisfy)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자기만족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풍성하다’는 헬라어 ‘플루테오(πλουτέω)’는 ‘부자가 되다’(to be rich)는 뜻입니다.

‘배부르다’는 단어는 완료 시제로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런 상태이고 ‘풍성하다’는 것은 부정과거시제로서 더 극심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배부르고 풍성해졌다는 것이 신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뜻입니까?

아니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외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고전3:1-2)을 이미 밝혔죠.

그런데도 그런 영적인 상태 속에서 스스로들 배부르고 부요한 자처럼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차원에서 보면 영적으로 풍족한 은사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과 ‘모든 은사’를 풍족하게 받았(고전1:5-7)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풍족한 지혜와 지식과 은사가 십자가의 제자도를 위해 사용하기 위함입니까?

자기 교만과 자기 파벌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하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 역시 헬라어로 부정과거형인데 이미 왕이 되어 군림하는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다른 사역자들이 보여준 본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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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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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본)본문 8절의 새번역 성경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배가 불렀고 벌써 부자가 된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나 아볼로와 같은 사도들과 지도자들을 제쳐놓고 왕이 된 듯 행세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정말로 그들이 왕이 되었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바울과 동역자들도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왕노릇 할 수 있다는 뜻이죠.

 

물론 이 말은 반어법입니다.

아직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수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지식과 은사를 앞세워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지도자들 편을 가르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수준으로 어찌 왕 된 구실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살펴볼 9-13절은 부요함과 왕노릇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는 달리 사도들의 비참한 상황을 밝혀줍니다.

바울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고난과 고초를 겪어왔고 세상의 어떤 구경거리가 되어 왔는지 말입니다.

그런 삶을 헤아린다면 어떻게 부요함과 교만을 자기 자랑으로 자기 파벌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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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저주인가 | 권성권 - 교보문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저주인가 | 성경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7가지 패턴이 있다는 게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찾아와 주시고, 그 인간과 관계를 맺어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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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인내와 수고를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여주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짧은 시간에 지혜와 지식과 은사를 많이 받지 않았더냐?”

그것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인 줄 안다면 더 성숙한 자세로 겸손하게 받들텐데 다들 교만한 왕노릇 하려고 하지 않았더냐?”

누구든지 스스로 된 줄 로 생각하면 넘어질 수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더냐?”

바울이나 아볼로는 결코 그런 본을 보여주지 않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함께 동역하며 함께 수고한 자들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앞에서 참된 믿음의 본을 바르게 보여주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거져주신 것이니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겸손하게 살고 있는지 말이다.”

너에게 있는 지식이나 재물이나 부요함을 본래부터 네 것인양 착각하고 그걸로 사람을 편가르기 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러니 너는 언제 어떤 은혜를 덧입고 부요함과 풍부함을 누릴지라도 더욱이 너를 따라는 믿음의 후배가 있을지라도 겸손한 주님의 종으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십자가 앞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십자가의 제자도이지 않겠느냐?”

 

(찬양)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 모습 내 눈에 안 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생활의 성숙도도 그렇게 될 수 있죠.

하지만 정말로 먼저 주님을 믿는 자는 참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 본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진 그 본이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고 당신과 살과 피를 나누신 그 십자가의 도 말이죠.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시간과 인내와 눈물이 필요한 법이죠.

그 과정 속에서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고 그를 통해 나중된 이들에게 참된 믿음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죠.

그때 비로소 선 줄로 생각지 않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신실한 신앙의 본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죠.

바울이나 아보로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그것이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그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신실하게 따르는 주님의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그런 주님의 십자가 은총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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