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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열왕기하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왕하4:8-44)

by 똑똑이채널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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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의 첫째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된지 2년 만에 죽고, 그 동생 곧 아합의 둘째 아들인 여호람이 왕이 되어 1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때 활약한 선지자가 엘리야에 이른 엘리사였죠. 엘리야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였다면,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였습니다. 왜 그 같은 사랑의 메시지를 엘리사로 하여금 선포케 하셨는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온 백성들이 최초 여로보암이 세운 벧엘과 단의 황금송아지 신전 앞에서, 그리고 8번째 왕 아합이 세운 바알 신전과 아세라 상 앞에서, 모두가 풍요와 번영의 신을 좇아 우상숭배자로 전락한 채, 그들의 공동체성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죠. 그 공동체를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다시금 세울 수 있는 길은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줌으로써, 다시금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읽은 말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 곧 신학교의 한 학생, 아내와 자식 둘을 둔 그 신학생이 죽자, 그 집안에 남은 것은 빚뿐이었는데, 이제 채권자들이 나타나서 그 집의 자식들을 종으로 팔려고 하는 상황이었죠.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그 선지자는 오바댜였음을 증언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그 집에 보내, 그 가정의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셨죠. 그 은총은 단순한 채무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풍요와 번영이라는 우상을 좇아 경제적인 이기주의자들로 변질돼 있었고, 형제와 친척을 돌보도록 제정해 주신 구약의 율례와 법도까지 무시한 채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그런 황폐화된 공동체성을 회복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었죠.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은혜가 망각된 시대,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탐욕과 이기심이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회복되고 구현되기를 바라는 통로로 쓰임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수넴의 한 여인과 그 아들에 관한 역사, 또 길갈에 이르러 행한 솥 안에 있는 죽음의 독을 제거해 준 역사,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보리떡 20조각과 자루 속 채소를 통해 100명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에 이르렀을 때, 한 귀부인이 자기 집에 엘리사 선지자를 모셔 음식도 제공하고, 심지어 집을 개조해 다락방을 만들어 그곳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까지 제공해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섬겼습니다. 그녀는 엘리사 선지자를 자연인 엘리사로 모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듯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헌신과 섬김에 감동을 받은 엘리사는 자기 사환 게하시가 말한 대로,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1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식을 줄 것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가 자라는 가운데, 이번에는 그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아이의 아버지도, 그 아이의 어머니도 다급하여, 그 집의 사환에게 갈멜산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모셔오도록 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엘리사 선지자가 어떤 방법으로 그 아이를 살려내는지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2-35절입니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사실 엘리사는 위대한 능력을 행한 선지자입니다. 다음 장에 보면 알겠지만 손도 갖다 대지 않고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낫게 했고, 그 다음 장에선 아람군대가 포위해 올 때도 기도를 통해 그들의 눈도 가려버리는 역사를 보여주게 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참 번거로운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그와 같은 행동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아이를 살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아이를 살리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아이를 살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간단하게 살리고 말았겠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엘리사가 행한 이적을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죠.

엘리사가 아이에게 엎드리고 눈 맞추고 입 맞추고 한 것 자체가 효험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죠. 시체에 사람이 엎드려서 눈 맞추고 입 맞추고 해서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엘리사가 그 일을 했을 때 아이가 살아났죠. 과연 이 사건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코자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시체가 된 그 아이와 엘리사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아이의 죽음과 엘리사가 하나가 된다는 것 말이죠. 바꿔 말해 수넴 여인의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멀리서 구경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아이의 죽음의 실체에 직면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그 차디찬 시체위에 자신의 몸을 일치시킨 것, 그것 역시 그 아이의 죽음을 엘리사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죽은 생명체가 스스로 살아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만약 스스로 살아난다면 그것은 잠시 기절했었거나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죠. 죽은 생명체가 살아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그 안에 들어갈 때에만 가능합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부분입니다.

에베소서 21절 말씀을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하고 말씀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 뻔 했던 우리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완전히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뜻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이미 죽어서 땅에 묻혀야 마땅하지만 그냥 침상에 놓아두었습니다. 그것은 침상에 누워 있다가 그 아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썩은 시체가 되는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죽음이 확실히 드러나게 되는 아이죠.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볼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웃고 즐기고 또 잠자리에 들지만 우리는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 영원한 형벌로 자연스레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결코 산 것이 아니죠. 죄와 허물로 죽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죽으셨기에, 이른바 우리와 입을 맞추고 손을 맞추고 눈을 맞추려고 사람이 되셔서 죽으셨기에, 우리에게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두어가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38-41절 말씀은 흉년 때 독이 든 국을 정화시키는 사건이고, 42-44절 말씀은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게 한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이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낸 것과 동떨어진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여 있다는 점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사건은 한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건이요, 그 후에 일어난 두 사건은 살아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생명을 존속시키는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특별히 보리떡 20개와 채소로 100명을 먹인 시간은 마치 벳세다 벌판에서 보인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가 질병과 가난과 한계상황을 만날 때,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시고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아버지이십니다.

 

*사랑하는 주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고자,

우리 입과 손과 눈을 맞추시고자 친히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죄와 죽음을 거두신 그 사랑에 어찌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먹는 것과 질병과 가난과 한계상황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속에서 저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도 저희의 가정과 자녀들과 일터 위에도 한없는 은총을 베풀어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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