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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열왕기하

대머리여 올라가라, 42명을 찢었더라(왕하2:12-25)

by 똑똑이채널 202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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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의 7번째 왕이었던 아합이 통치하던 22년의 세월 그리고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2, 그리고 아하시야의 동생이자 아합의 둘째 아들인 여호람의 통치 초입까지, 엘리야는 적어도 25년 넘게 하나님의 심부름꾼,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약했습니다. 물론 출신도, 성장 배경도, 어느 문하생인지도, 3대째 족보도 알 길이 없는 선지자였죠. 그야말로 아합 왕 앞에 혜성처럼 등장한 선지자였죠. 그는 털이 많고 허리에 짐승의 가죽 띠를 두른 사람으로서, 신약시대의 흡사 세례 요한과 같았던 인물이죠. 그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3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고, 사르밧 과부의 곡물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은총을 덧입게 해 주셨고, 그 과부의 죽은 아들도 다락방에 올라가 기도할 때 살려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셨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850명과 세기의 대결을 벌일 때 하늘의 불로 응답해 주셨고, 아람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올때에도 아합이 이끄는 7230명의 군사로 그들을 물리치게 하시는 능력을 베풀어주셨죠. 그 모두가 엘리야를 통로로, 또 동시대의 무명의 선지자들을 동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아합에 이어 아하시야 그리고 그 동생 여호람이 통치하던 그 때에, 자기 사명을 다한 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엘리사를 분리시키길 원했는데, 엘리사는 스승이 가는 곳까지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죠. 마치 룻이 나오미를 따라 나선 격이었죠.

그래서 어제 살펴 본 것처럼, 그들 두 사람의 이동경로는 그와 같았습니다. 최초 길갈에서 벧엘로, 또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을 갈라 통과한 경로였죠. 왜 그 같은 이동경로였습니까?그것은 곧 구원의 은총을 되새김질 하도록 하는 이동경로였습니다. 이른바 그 옛날 모세가 모압 산에서 요단강 너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들어가고자 했지만, 그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수종자 여호수아를 통해 출애굽의 1.5세대와 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함께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맨 먼저 요단강을 건너게 했고, 그 다음에 가나안 땅의 중부지역인 여리고 성읍을 정복케 했고, 그 다음 남부지역을 그리고 다시금 중부로 올라와 북부 지역을 정복케 했죠. 그리고 성막을 길갈에 진 치게 했습니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전에 이전의 가나안 땅 정복을 다시금 되밟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엘리야 자신도 가나안 정복의 후예로 태어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새기도록 하신 것이요, 동시에 지금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을 차지하며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실은 그 옛날 자신들의 선조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정복하여 살게 된 것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 너희들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게 길갈에서 벧엘로, 또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을 건너, 모세가 있던 그 어느 지점까지 왔던 엘리야는 바로 그곳에서 회리바람과 함께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해갔습니다. 마치 에녹처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격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케 하신 것일까요? 만일 그의 시신이라도 남겨두고 또 그의 무덤까지 남겨 두게 했다면 모세처럼 신격화할 게 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신도 그의 무덤도 존재치 않게 하신 것이었죠. 더 나아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로 부름 받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해 가신 것처럼, 이 땅에 남은 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머잖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엘리야를 표본으로 하늘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다한 후에 하늘나라로 부름 받는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사건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해 간 상황에서 이제 그곳에 남은 자는 엘리사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늘로 승천해가는 엘리야를 향해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하고 소리를 쳤죠. 그래도 하늘로 승천해 가는 엘리야를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하늘로 부활 승천해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갈릴리 사람들과 똑같은 격이었겠죠.

그러면서 엘리사가 행한 모습에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본문 12절 하반절과 13절에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갖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이게 무엇을 뜻하는 말씀입니까? 엘리야의 갑절의 능력을 구한 엘리사에게 그 능력이 임했는데, 중요한 포인트는 엘리사 자신의 겉옷이 아닌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강 물을 쳤을 때 그 능력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해 엘리사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늘로 승천해 갈 때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의 능력,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만 엘리야와 같은 동일한 능력이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죠. 달리 말해 이때부터 엘리사가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엘리사 개인의 능력이 아닌 철저한 성령님의 능력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만하거나 우쭐대거나 자기 자랑거리로 삼지 말라는 뜻이죠.

이제 엘리사에게 그와 같은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여 요단강을 건넌 사실을 선지자의 제자들, 다시 말해 그 당시의 신학교 학생들이 알고서, 엘리사에게 나가 엎드리고 경배하죠.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늘로 승천하는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셨을 것이니, 우리가 나서서 찾아보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엘리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죠. 그런데도 그들이 나서서 찾아봤는데, 본문 17절에 사흘 동안을 찾아봤지만 발견치 못했다고 밝혀주죠. 의미심장한 것은 그 사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사흘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이제 엘리야의 존재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진정으로 엘리사의 시대가 열린 셈입니다. 그때 엘리사가 맨 처음 행한 사역이 나오는데 본문 19-22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리고 성읍의 나빠진 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는 통로로 쓰임 받은 게 그것이었죠.

 

그리고 두 번째로 엘리사의 존재감을 드러낸 일이 본문 23-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때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읍에 왔고, 그 성읍의 쓴 물을 좋은 물로 바꿔주는 주님의 통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제 벧엘로 올라왔는데, 그곳의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대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대머리여”(23), ‘어 저기 대머리가 올라가네.’하고 조롱한 것이죠. 그래서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했는데, 그때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 그 아이들 중 42명이 찢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때 아이들이 철부지가 아니라 17(요셉)에서 30대 초반의 아이들이라는 점이죠. 성경 원문은 크타나임 나아림’, 이는 보다 젊은이’(younger)를 뜻합니다. 라쉬 주석은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이가 없다고 해석을 하죠. 그것은 이 젊은이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보면 알 수 있죠. 당시에 여로보암이 세운 황금송아지 신전이 있는 벧엘입니다. 벧엘에 사는 젊은이들 가운데 그 부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인 것이었죠. 그래서 올라가라는 것도 이전에 엘리야처럼 너도 하늘로 올라가봐라하고 엘리사를 향해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그때 엘리사는 레위기 2621-22절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으면 너희의 죄대로 들짐승을 보낼 것이요, 그것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킬 것이란 말씀 그대로 말이죠. 그래서 곰이 나와 찢어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사는 자들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님을 일깨워준 것이죠.

또 다른 하나는 과연 이때 엘리사가 그 아이들, 그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혹시라도 이 일이 엘리사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아 도취에 빠진 모습은 아닌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야 그런 경우라면 정말로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죠. 물론 이때의 일을 거울삼았는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엘리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 뜻에서 본문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자는 타인의 외적인 모습보다 속 죽심을 보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며 살도록 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이나 지위를 만용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나를 왜 이런 위치 속에 세워주셨는지, 늘 겸손하게 물으며, 하나님의 영광된 도구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도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엘리야가 떠나고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요단강도 가르고, 그 능력으로 여리고 성읍 쓴 물도 좋은 물로 바꾸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런 엘리야가 대머리여 하고 무시하는 젊은이 42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모두 곰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과 탐욕으로 가득찬 젊은이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무시한 심판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엘리야였다면 어떻게 했을지 더욱 생각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능력과 지위로 만용을 부리기보다 늘 겸손한 주님의 도구로, 생명을 살리는 통로로 쓰임받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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