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선지자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된 엘리사의 사역들이 계속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합 왕의 22년 통치 때 또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2년 때 그리고 그 동생 여호람의 초기 집권 때 활약했던 엘리야의 사역은 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었죠. 그에 반해 아합의 둘째 아들이 통치하던 여호람의 시대에 활약한 엘리사의 사역은 주로 하나님의 생명과 자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패역한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수가 소수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손길을 펼쳐보여 주신다는 것을 만방에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상황은 선지자 생도, 요즘 말로 하면 선지학교, 곧 신학교를 가리키는데, 그 신학교에 다니는 남편이 죽게 되었는데, 아무런 경제적 대책도 없이 갑작스럽게 죽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 신학생 남편이 죽자, 그 가정엔 그 아내와 두 명의 자식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빚이 있는 상황이요, 그래서 채권자가 찾아와서 두 아들을 데려다가 종으로 삼고자 하는 상황입니다. 그 아내로서는 그 빚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한 순간에 집안이 무너지는 위기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대 랍비들은 그녀가 아합 왕의 궁내대신 오바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바댜는 사악한 여왕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려할때 구해 낸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를 위해 빚을 지면서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한 오바다였고, 그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아내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남편은 주의 일을 한다며 자신의 가족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엘리사도 그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사도 그래서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가정이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 처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마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나는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시37:25)고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돕지 못하시는 건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말라버린 것인가? 별별 생각들을 다 할 수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가족과 친척들을 통하여 가난한 자를 돌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친족 간에 기업 무를 자에 관한 법, 곧 49년째가 되면 모든 빚진 자와 원통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종된 자들도 다 원상태로 회복시켜주고, 그들이 저당 잡힌 땅조차도 다 돌려주도록 한 제도가 ‘희년’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땅을 갖고 있는 농사를 지어 소출을 거둘 때 필히 그 소출의 이삭을 떨어뜨려놓아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가 주워 먹도록 하는 은총의 법을 제도적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 내에서는 채무의 굴레로 인해 억압받지 않도록, 가족과 혈족 단위로 보호 받도록 율례와 법도를 세우신 것이었죠. 그만큼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 되었던 집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다시는 종이 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감싸고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 나라 구석구석에 풍요와 번영의 신, 바알과 아세를 세웠고, 그 풍요와 번영을 좇아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기주의자들로 변질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나 나나 나 혼자만 내 가정과 내 자식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됐지, 왜 내가 내 혈족과 친족들의 어려운 상황까지 책임지고 돌봐줘야 한단 말인가? 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채권자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학생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과부가 된 그 아내도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사회적 안전장치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 자식들마저 종으로 팔려나갈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의 자식들이 ‘빚쟁이의 종’이 될 지경에 내던져진 상황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수종자이자 당신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던 엘리사를 보내시죠. 어느 정도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는 대리인으로 삼고자 하심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구현하여,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토록 하기 위한 게 그 초점입니다. 바꿔 말해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은혜가 망각된 시대,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탐욕과 이기심이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원리, 말씀의 원리가 회복되고 구현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죽은 신학생의 아내에게 질문을 던지죠. 본문 2절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하고 말하죠. 이른바 그녀가 소유한 것이 무엇인지를 엘리사가 묻는 상황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성경의 기적은 대부분 그들이 가진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엘리야도 사렙다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는 통로가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있던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고, 벳세다 벌판에서도 보리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을 가지고 5천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를 거두게 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미 있는 것은 그것이 작고 보잘 것 없어도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물질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정말로 작고 초라해 보여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그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자신의 집에는 기름 한 그릇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죠. 그래서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이웃으로부터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려, 남아 있는 기름을 부으라고 말이죠. 그 명령에 여인이 순종하죠. 이웃집에 가라고 하니까 가고, 또 통을 빌리라고 하니가 빌립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라고 하니까 또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하니까 부었습니다. 가득 찰 때까지, 더 이상 남아 있는 그릇이 없을 때까지 부어서 채우라고 하니까 채웠습니다. 그 어머니도, 그리고 그 어머니의 아들들도 함께 적극적으로 엘리사의 명령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빌린 모든 그릇에 그 기름이 가득가득 채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됐죠.
그 순종을 통해 주님의 채우심을 발견케 한 그 식구들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7절에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를 향해 당신의 은총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친히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절망의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도, 앞길이 막혀 있을 때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도,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그 선지자의 생도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동행할 때, 나머지 모든 문제를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할 성령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절망에 처해 있을 때, 남은 희망마저 차압당해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 우리가 관계 맺고 살아온 모든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회복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회복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시선은 나로부터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이웃들을 섬길 수 있는 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희락을 덧입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이 사라진 이 시대에 당신의 말씀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찾고 계심을 알려주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찾아와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랴” 말씀하시는 주님.
한계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에 호소하길 원하시는 주님.
그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로 역사하실 것이오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은총을 덧입게 되었을 때, 우리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이웃을 섬기는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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