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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불가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는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구도자가 될 때 그 구도자의 최종 목적지를 바라봐야 하는데 그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중할 때 하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참된 길을 놓친다는 의미죠.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 곧 크리스천이란 말이 언제 시작됐습니까?
사도행전 11장에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 붙여주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줬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만을 따르며 섬기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교회 성도들은 어떤 우상도 황제숭배사상도 따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이 세상의 것에 한 눈 팔지 않는 자들이었죠.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향해 ‘크리스천’이란 이름을 붙여준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크리스천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만을 믿고 섬기고 따르는 자들입니까?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때로는 이 세상의 것을 쫓거나 이 세상의 철학과 사상을 좇거나 신학자를 좇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바 목회자들 중에는 웨슬리나 루터나 칼빈이나 로이드존스 목사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분도 있죠.
그런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이 세상의 신학자와 목회자를 더 추종하는 자입니다.
문제는 자기 홀로 그렇게 조용히 따르면 될 것을 파벌을 만들면서 당파싸움을 부추기는 부분들이죠.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야말로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육신에 속한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크리스천이 가리켜야 할 그리스도보다 실은 사람과 신학자와 목회자와 파벌을 내세우는 손라각과 같은 격이죠.
교회 안에도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말씀을 가까이 한다면서 신령한 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경받을 일이지만 그것으로 자기 우월감이나 파벌을 만들거나 그렇지 못한 이들을 무시한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죠.
그것은 결코 크리스천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은 언제 어디서나 화평과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이는 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적용)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위치에 있든지 손가락보다 그 달을 바라보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푯대는 사람이나 철학이나 어떤 목회자나 신학자나 신령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푯대 삼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역배)지난 시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구원의 섭리와 구원의 지혜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성령에 속한 사람들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인데 그들이 신령한 구원의 비밀을 알고 깨닫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에 속한 사람 헬라어로 ‘푸쉬키코스’인데 그들은 신령한 구원에 대해 깨달을 수 없다고 했죠.
그들은 육신덩어리와 같은 이들로 구원에 대한 영적인 개념이 열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프뉴마티코스의 사람들은 영적인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판단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사람이 오류나 실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죠.
구원받은 영적인 프뉴마티코스의 사람들도 죄성이 있어서 연약함과 허물을 보일 수 있는 것이죠.
그만큼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결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신령한 자라야 곧 성령 안에 거하는 자들이라야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육신에 속한 자가 있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파벌을 만들어 분열을 일삼는 자들이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실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인데 그런 자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 살지 말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본문 1절에서도 “형제들아”하고 운을 뗍니다.
고린도교회가 극심한 분열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도 ‘형제들아’하면서 다정하게 부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바른 책망을 위해 한 호흡을 가다듬고자 말하는 것이죠.
(원해)여기에서도 바울은 ‘신령한 자’라는 말과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을 대조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란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헬라어로 ‘사르키코스’(σαρκικός)로 자연인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육적인 인간’ 곧 ‘자연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사르키코스’라고 한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신앙이 성숙하지 못해 성령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더 붙잡혀 사는 사람이죠.
구원은 받은 것 같지만 오직 육적인 세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을 위해 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머물 때 젖으로 먹였다고 말합니다.
가난 아이 시절에는 젖을 먹이고 더 크면 미음과 죽을 먹이고 장성하면 밥을 먹이죠.
바울은 그렇게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에게 젖을 먹여왔는데 문제는 장성해도 그런 젖을 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미성숙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편가르고 비난하고자 한 것입니까?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형제들아’하고 다정하게 불렀겠습니까?
그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미성숙해서 벗어나 성숙한 그리스도인, 영적으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전개)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어떤 모습 때문에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본문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원해2)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에 대해 ‘시기’와 ‘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시기’로 번역된 ‘젤로스’(ζῆλος)는 본래 ‘끓다’(to boil with heat)라는 뜻을 지닌 ‘제오’(ζέω)에서 파생한 단어죠.
문자적으로는 ‘뜨거움’이란 뜻이 있지만 통상 ‘열심’이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만큼 열심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열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될 때 ‘시기’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말 ‘분쟁’으로 번역된 ‘에리스’(ἔρις)는 ‘다툼’ ‘투쟁’(contention) ‘논쟁’(wrangling)을 뜻하는 말이죠.
신약 성경 가운데 바울만 사용한 단어(고전1:11)입니다.
분쟁은 시기를 외적으로 표출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영적인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적 은사들이 사랑이 수반되지 않으면 오로지 자기 중심적인 은사로 전락할 수 있죠.
시기와 분쟁도 그래서 실은 사랑에 반대되는 이기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죠.
(깨달음)그만큼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교회 내에서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자들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추종하는 이들도 그렇고 아볼로를 내세우는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을 추종하고 사람을 따르게 만들고 분파를 만드는 것 자체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오’하고 말하는 것이죠.
“육의 사람이 아니리오”하는 것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이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 같고 자신이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고 바울과 아볼로를 내세우지만 실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만든 자라는 것이죠.
그런 자들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임과 다를 바 없는 육신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이 아무리 신령한 것을 이야기해도 실은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래서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저와 여러분은 달을 바라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되는 것이죠.
제가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결단코 나를 내세우거나 나의 신학이나 철학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들렸다면 제가 어리석게 전달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이나 사람의 궤변을 추종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추종하고 따르는 크리스천이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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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성령에 속한 자로서 시기와 분쟁을 버리고 사랑과 화평을 좇는 은혜아 안에 머물기 원하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처음붙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푯대로 삼고 있느냐?”
“너도 처음에는 영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육신적인 것에 치우치고 있지 않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처음에는 그리스도로 시작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들이 받은 영적인 우월성을 자랑하지 않았더냐?”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파벌을 형성한 그들의 모습이지 않다녀?”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네가 성령충만한 프뉴마티코스의 사람인지 아니면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육신적인 것을 버리지 못한 사르키코스의 사람인지 분별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쏠려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예수 안에서 열심을 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말씀에 기반하지 않고 너를 중심에 놓으면 시기와 질투와 분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하지 않겠느냐?”
“오직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죽노라 고백했던 바울처럼 너의 자랑 너의 경험 너의 지식을 내려놓고 날마다 성령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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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충만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도 가까이 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영적인 자기 우월감으로 삼고 타인을 얕잡아 보고 판단한다면 결코 성령님이 기뻐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 자들이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파벌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바울은 그런 자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요 젖을 먹는 자들이요 실은 구원받았지만 세상의 육신적인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책망하는 것은 그런 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서 교회가 하나 되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하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 모두도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크리스천으로서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 높이고 바라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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