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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태복음

스스로 뉘우쳐(마27:1-10)

by 권또또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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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일을 자기 주도로 계획하고 이루어가는 것 같지만, 그 모든 너머에 하나님의 섭리하신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오늘 본문도 그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목요저녁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찬식을 거행하신 뒤에, 기드론 골짜기 곧 죽음의 골짜기를 거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당신이 받아야 하는 ‘고난의 잔’을 놓고 기도하기 위함이셨죠. 그 기도가 끝나자 가롯 유다가 데리고 온 무리들이 칼과 망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열 두 군단 되는 천군 천사, 곧 7만 2천 명에 달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해 그 세력들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른다면서 순순히 체포당하셨죠. 만약 그렇게 할 경우에는 결코 구약성경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없었던 까닭이죠.

그 무리들에 의해 체포당하신 주님은 그날 한 밤 중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끌려가셨죠. 명목상의 대제사장은 사위 안나스였고, 실질적인 대제사장은 장인 가야바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산헤드린 의원들이 나와 있었죠. 70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법정기구인 산헤드린 의원들 가운데 정족의결수인 23명이 나와 있었는데,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와 산헤드린 의원들은 미리 짜 맞춰놓은 여러 명의 거짓 증언자들을 동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죄를 들먹이며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지었죠.

그런데 그 무렵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베드로는 그 관정으로 함께 따라들어왔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를 그 관정 안으로 들어오게 해 준 또 다른 제자가 있었음을 증언하는데, 그는 그 정도로 대제사장과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게 해 주죠.

그때 계집종을 비롯한 세 명의 사람들이 나서서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와 함께 한 제자’라고 말하는데,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심지어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섰죠. 바로 그 때 새벽닭이 울기 시작했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믿음이 없다고, 참 어리석은 자라고, 욕할 수많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한계요,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도 똑같이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둠 속에 울던 닭 울음소리와 함께 그는 밖에 나가 통곡하며 회개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그 시각에 울던 닭 울음소리는 단순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이요, 그 분의 음성 앞에 베드로의 심령이 녹아내렸기에 회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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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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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고아와 같이 우리를 내 버려두지 않고, 죄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그대로를 품어주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분의 사랑 앞에, 그 분의 은혜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자세죠. 실수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품어주시는 그 분 앞에 나아가는 것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롯 유다는 그 분의 은혜와 사랑 앞에 결코 나아가지 못한 자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목요일 날 한 밤 중에 가야바의 관정에서 장시간 심문을 받았습니다. 여러 명의 거짓 증언자들, 이른바 23명의 산헤드린 의원들이 이미 짜맞추어 놓은 거짓 증언자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단단히 옭아맸죠.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덧씌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제 본문 1절을 보면 어느덧 새벽이 밝았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 새벽에 이제 예수님은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총독 빌라도의 관정으로 이제 끌려가시는 것이죠. 그 한 밤 중에 체포당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23명의 산헤드린 의원과 그들이 내세운 거짓 증언자들에게 심문을 받으며 시달렸던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심문을 받으러 빌라도의 공관으로 끌려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피곤하실지, 얼마나 괴로우실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늘 보좌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도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닌데, 그날 밤 한 밤 중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심문을 받고 또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가는 상황이라면 너무나도 힘든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 할 길이기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길이기에,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이죠. 이것이 곧 십자가 사명의 길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입니다. 그 분의 사명의 길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열린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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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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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본 한 명의 제자, 베드로 말고도 또 한 명의 제자가 있음을 오늘 본문이 증언해 줍니다. 이름 하여 가롯 유다가 그 제자입니다.

본문 3-5절이 이와 같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가야바 공관에서 한 밤 중부터 새벽녂까지 심문을 받고 모욕을 받는 것을 다 지켜봤던 것입니다. 그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는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본문이 증언해 줍니다. 그의 정죄됨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죄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뉘우쳤다’는 것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 그가 스스로 뉘우쳤다는 뜻입니다.

그의 뉘우친 모습을 보면 마치 회개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말 ‘스스로 뉘우쳤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멜로마이’는 ‘자책감’(remorse)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복음서를 통해 한 번도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이 ‘랍비’ 곧 ‘스승’으로만 여겼던 그였기에, 적어도 자신이 취하고자 한 은전 30냥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그런 자책감 정도는 지녔지만, 결코 그는 회개한 게 아니었습니다. 회개란 ‘메타노에오’로서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죠. 만약 그가 회개했다면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뉘우쳐서 그 돈을 다시금 성전 관계자들에게 주고자 했고, 그러나 그들이 받지 않자, 그 성전에 던져버리고 나왔는데,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자 했다면, 자기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할 게 아니라, 주님 앞에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며 나아가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차이점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자와 단지 ‘선생’으로 고백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이 오늘 본문 9-10절을 보면, 구약의 예레미야서 19장과 스가랴 11장에 나오는 내용이 성취된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도 우리 곁에 일어나는 일들이 내가 주도해서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결코 그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고백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베드로가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었던 것, 그가 다시금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가롯 유다가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닐 때 왜 그런 기회를 주님께서 부어주지 않았겠습니까? 마지막에라도, 그가 스스로 뉘우치는 자책감과 더불어, 그 자책감마저도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시는 것임을 깨달았다면, 그래서 더 처절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더라면, 결코 그는 자결하는 것으로 자기 생을 끝마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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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연약한 그 상태 속에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것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은 은혜로 채우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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