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예수님께서 이제 성전에서 나와 동쪽 베다니 마을로 가시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의 눈동자는 성전, 곧 헤롯이 46년 동안 증축한 성전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전이라는 건물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화려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말을 들을 때 얼마나 황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고, 감람산 곧 올리브나무가 많은 감람산, 기드론 골짜기 맞은편에 위치한 그 감람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이 묻죠? 본문 3절에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두 가지 질문 곧 언제 성전이 무너질지, 주님의 임하심 곧 세상 끝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물었습니다. 실제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진 것은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 질문을 던진 지 약 3-40년 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의 때에 어떤 징조가 있을지 말씀해 줍니다. 이 내용들이 올리브나무 곧 감람산에서 행한 강론이라고 하여 ‘감람산 강론’이라고 칭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총 5번에 걸쳐 예수님의 강론, 즉 5번에 걸친 설교가 나오는데 본문이 그 5번째 설교요 마지막 강론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말의 징조가 있을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로는 5절에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하는 거짓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전도관의 창시자 박태선이나 통일교의 문선명 혹은 JMS의 정명식이나 또 신천지 집단의 이만희씨 같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겠죠. 이것은 우리 시대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곧 ‘구원자’라는 이름을 써 가며 ‘구원자’ 행세를 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칭 ‘예수’라 하면서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킬 것이라며 활동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구별하기 위해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고 구별하여 부른 것 아닙니까? 그렇게 거짓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그것이 종말의 시작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종말의 시작은 매 역사의 정점에 일어났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는다” 헬라어 원문은 ‘난리’를 ‘폴레모스’(πόλεμος)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쟁’을 가리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에서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들을 것이다”하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런 소문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6절 끝부분에 “끝이 아니니라” 대신에 7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것이 끝이 아닌 “재난의 시작이니라”하고 가르쳐주십니다. 민족과 민족 간에 그리고 국가와 국가간에 전쟁이 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겠죠. 기근과 지진입니다. 기근은 굶주림을 뜻하는데, 오늘날 미국이 비축한 식량만으로도 전 세계 인구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하죠. 그런데도 그들은 전쟁과 가격폭등을 대비해 풀지 않고 쌓아두고 있죠.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고 있는 기근입니다. 지진은 ‘지각대의 변화’ 때문이고, 전 세계 지진의 80%가 환태평양지진대에서 발생한다고 하죠. 아메리카-일본-필리핀-뉴질랜드의 연결고리 말이죠. 물론 그것이 이제는 우리나라도 예외이지 않죠.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이 흐름이 요한계시록에도 그대로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2-8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첫 번째 봉인을 뗄 때 흰 말을 탄 자가 거짓 메시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고, 두 번째 봉인을 뗄 때 붉은 말을 탄 자가 화평을 제한 채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을 하고 있고, 세 번째 봉인을 뗄 때 검은 말 탄 자가 저울로 음식물을 속이기 때문에 기근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고, 네 번째 봉인을 뗄 때 청황색 말을 탄 자가 검과 흉년과 사망을 일으킨다고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보자면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재난의 시작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본문 9-13절인데, 주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것, 곧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 또 서로 미워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이라고, 불법이 성하여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끝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의 말씀이 성취될 때에 “그제야 끝이 오리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때” 바로 그때가 끝날 곧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자, 주님의 재림의 날이자,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특별한 사건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내용 곧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에 대한 이야기죠. 그것은 헬라 제국의 셀류쿠스의 ‘에피파네스’가 행한 것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성전에 돼지머리를 갖고 놓고 절을 하게 만들었고, 성전제사를 금해버렸고, 안식일도 폐지시켜버렸죠. 그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 환란을 피해 도망치거나 숨어버린 일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런 환란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그 이전에도 그 후에도 없을 것 같은 극심한 환란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본문 22절입니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이른바 그 환란의 날들을 하나님께서 줄여주셨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에피파네스의 통치 권력을 갈아치우셨다는 뜻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종말에는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고, 그 종말의 상황이 다가올 때에도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삶 때문에 여러 가지 환란과 고난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2천년 전 카타콤이나 에피파네 치세때의 외적인 극심한 고통과는 전혀 다른 내적인 심적 고통이 되겠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내적인 고통까지도 줄여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요? 나를 괴롭히는 이들을 변화시켜주심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 앞에 매달리며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며 잘새(마25:1-13) (1) | 2023.12.11 |
---|---|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마24:36-51) (0) | 2023.12.09 |
화 있을진저(마23:23-39) (2) | 2023.12.06 |
화 있을진저(마23:1-22) (1) | 2023.12.05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4-46) (0) | 2023.12.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