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그런 은총을 베푸실 때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것은 아니었죠.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일으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그 주권’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죠. 그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죠.
바리새인은 본래 ‘분리된 자’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말은 BC 130년경 헬라제국의 셀류쿠스 왕조의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안식일도 폐지하는 철권통치를 펼칠 때, 유대 민족의 독립운동인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는데, 바로 그 무렵에 ‘페루쉼’ 곧 ‘바리새인’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후기 때, 유대인들 중에 지금 우리가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구별되게 철저하게 지키자는 움직임 속에서 태동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렇게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존경했습니다. 문제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한 나머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앙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여겼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 자신들의 우월감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에 대한 긍휼과 인자함과 사랑이 결여돼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바리새파의 문제점이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외식주의자’로 규정했던 것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그렇다면 사두개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사두개인 (Sadducees)은 B.C. 2세기경부터 A.D.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까지 존재했던 유대주의 한 집단입니다. 사두개인이란 말은 다윗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보죠.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의 역할을 가장 존중했고, 그 때문에 대제사장들에게 충성한 친인척들과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권세로 성전을 맡아 관할했고, 대부분이 산헤드린의 회원들었죠. 그만큼 현실 정치의 기득권을 유지했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과 사후 심판 그리고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메시아의 오심’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없었죠.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나름대로의 전통 때문에, 또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백성들을 통치수단으로 삼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신흥별처럼 떠오른 예수님을 거부하고 깎아내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고, ‘소경’에 불과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심지어는 그들이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닫고 있는 자’라고 말씀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제 읽은 13절 말씀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일반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오늘날의 이단이고, 이단의 교리를 통해 선한 그리스도인들을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지옥 백성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그래서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또 상석에 앉아 있지만, 그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천국 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장에는 총 7개의 단락으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하는 이 말씀은 구약의 이사야서 5장 8-23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고, 또 하박국서 2장 6-20절에 나와 있는 말씀인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와 하박국서의 ‘화 있을진저’하는 대상은 같은 유대 동족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 피로 자기 성읍을 짓고자 하는 자들, 스스로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자랑하고 교만하는 자들, 뇌물로 악인을 의롭다고 하고 의로운 자를 악하다고 하는 자들을 일컫고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그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를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쏟아붓고 있는 격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외식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지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아서 우리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고생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문제는 그 율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인위적인 전통들을 만들고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무시하고 억압코자 했던 그들이죠. 더 문제가 된 것은 정작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의 전통을 그들은 지키지 않았고, 그렇게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긍휼로 품거나 사랑으로 안으려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일컬어 ‘외식’이라고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향해 진노와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그것이 총 7가지였는데, 어제 3가지 화에 대해 살펴봤고, 오늘은 그 네 가지 것의 ‘화’에 대하여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그 네 번째 ‘화’가 무엇입니까?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채소와 허브의 십일조까지 장부에 적어서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다는 점이죠. 그러나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섯번째 ‘화’는 25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른바 마음속 그릇은 깨끗이 씻으려 하지 않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겉으로 보이는 잔과 대접만 깨끗하게 하려는 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여섯번째 ‘화’는 27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른바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채, 속에서는 악취가 나는 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하고 가지런한 잔디로 잘 정돈된 묘지이나 몇 미터 파고 들어가면 묘지 속은 온통 썩어 가는 뼈와 벌레가 파먹어가는 살들뿐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으로 거룩한 것으로 보이나 그 속은 온통 남을 속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죠. 목회자도 목회자라는 타이틀만 갖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게 아니라는 점이죠. 성도가 성도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결코 거룩이 찾아오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화’는 29-31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역사의 과거를 바라보며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 동일한 죄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죠.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게 바로 그런 뜻이죠.
이런 그들을 향해 33절에 주님께서 엄청난 말씀으로 비판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실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 아닙니까? 그러니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마저도 사람들 앞에 자랑치 않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현대판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될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늘 머금고 사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59805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마24:36-51) (0) | 2023.12.09 |
---|---|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는다(마24:1-22) (2) | 2023.12.07 |
화 있을진저(마23:1-22) (1) | 2023.12.05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4-46) (0) | 2023.12.04 |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마22:15-33) (2) | 2023.1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