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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겉옷은 단지 옷 한 벌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일교차가 큰 팔레스타인 지역의 낮은 뜨겁고 밤은 춥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겉옷으로 한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했습니다. 특히 밤에는 이불 대신에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유용한 필수품이었죠. 그러니 겉옷은 단순히 하나의 옷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가난한 서민들에게 겉옷은 가진 재산의 전부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모세의 율법에는 겉옷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사람은 해가 지기 전에 옷을 돌려보내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소중한 자신들의 겉옷을 길바닥에 깔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를 높였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겉옷을 길바닥에 깔며 어떤 사람을 맞이한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우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9장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자신의 한 제자에게 예후라는 사람을 찾아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름을 붓고, 여호와가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다는 말을 전하고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는데,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폭정이 극에 달해 있던 때였습니다. 엘리사의 제자는 군대장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예후를 따로 불러내 그에게 기름을 붓고 선지자의 메시지를 선포한 후 도망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군대장관들이 몰려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어안이 벙벙해 있던 예후는 방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옷을 예후의 발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가 왕이 되었음을 선포했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왕하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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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 유대인들의 행동,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까는 행위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세워졌음을 선포하는 행위 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때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이 유월절이 다가 오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유월절이 다가 오면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이미 계산하고 계셨다는 듯이 행동하셨습니다. 평소의 주님이시라면 예루살렘을 찾는 여느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걸어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을 이끌어내려고 작정이라도 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조건과 상황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대로 주님은 왕으로 등극하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리했다면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는 저절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은 백성들의 환호와 찬송을 확인하신 뒤, 당연히 이어야져야 할 후속조치들을 취하셨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죠. 군중들이 기대했던 왕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어 성전에 들어가셔서 거기에 깔린 좌판들을 죄다 엎으시고 매매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3절)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에는 누군가가 성전을 ‘강탈’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찾으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빼앗긴 ‘영토’나 ‘나라’가 아니라, 빼앗긴 ‘성전’을 다시 찾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성전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책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들이 봤을 때 성전은 너무나 잘 관리되고 있었고 다가오는 명절에 대한 준비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 다시 말해 무력으로 탈취당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예배하며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곳은, 경제적인 이득과 이권을 탐하는 사람들에 의해 강탈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참된 예배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있어야 하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없어지고 행사 치르듯 제사를 드리며, 편한 제사를 위해 필요한 물품을 사고파는 상행위만 남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연호하며 열광하는 그 백성들에게 잃어버린 나라보다 더 중요한, ‘잃어버린 기도’,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찾아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성전은 과거 솔로몬이 드렸던 기도의 내용처럼, 백성들이 간구하는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장소여야 했습니다. 성전은 누구든지 들어와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열망은 1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주님께서 장애인들을 고쳐주셨다는 이 장면은 전체적인 글의 흐름상, 굳이 없어도 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기자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이 장면을 기록해둠으로써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까?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성전에는 장애를 입은 자들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들어올 수 없는 그 장소에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성전은 누구든지 와서 기도하고 나음을 입을 수 있는 만남과 회복의 장소임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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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유대인들의 성전이 상업주의와 이권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강탈되었다면, 오늘날 성전의 의미도 동일한 방식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우리 그리스도인조차 그러하다면, 주님을 모르는 이 땅의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우리와 사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심령이 성전이 되어, 주님과 늘 교제하는 삶, 주님과 친밀한 시간을 더 갖는 것이 우리가 참된 성전으로 사는 길이요, 곧 왕이신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날 때 기독교 사업과 기독교 세력과 자신들의 기독교 지식과 교회들의 상태와 신학의 문제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대의 기독교 서적들과 잡지들에는 기독교 교리, 기독교 규범들,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대한 문제들, 기독교 봉사의 기술들에 대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의 내적 현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우리의 설교들은 많은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구주 간의 교제에 대해서는 거의 담고 있지 않다.” (301쪽) 제임스 패커(James Innel Packer)의 〈청교도 사상(Among God’s Giants)〉(CLC·2016)은 1550년에서 1700년 사이 영국의 청교도들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 청교도 사상을 되짚어 준 것입니다. 왜 영국에서 청교도가 촉발되었는지 그것이 왜 하나의 사상사를 형성케 됐는지 알 수 있게 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는 한 참이나 밀려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담한 심정이죠. 그래서 나도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시간을, 앞으로 더 늘리기로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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