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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서 겪으셨던 그 일들을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3가지 사건이 기록돼 있죠. 첫째는 14-21절까지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 둘째는 22-23절까지로 십자가 수난에 관한 2차 예언,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은 24-27절까지로 성전세 납부 문제에 관한 말씀이죠.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세 가지 사건을 모두 다루기보다는 첫 번째 사건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20절에 나오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에 관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쟌 월턴이라고 하는 분은 막가파 인생을 살고 폐인이었습니다. 26살이 될 때까지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온갖 죄를 짓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교회에 나와서 첫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가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기라고 하여도 옮길 것이요”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아! 믿음은 굉장한 믿음이 아니로구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능력이 있구나. 축복이 있구나.’ 이런 것을 깨닫고 이 사람은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술 담배를 끊게되고, 온갖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죠. 그리고는 실제로 그 겨자씨를 자기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작은 겨자씨를 꺼내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았다고 하죠. 평생 그 작은 겨자씨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믿음을 위해 기도하던 쟌 윌턴은 그 후에 기업가로서 크게 성공을 했고, 71살에 은퇴할 때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작위도 받았다고 하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동안,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에 광채가 났고 그 분의 옷도 온통 희어져 빛이 났고 말입니다. 그때 모세의 영채도 내려왔고 엘리야의 영채도 내려왔었죠. 그 황홀한 광경에 도취된 베드로와 제자들은 차라리 산 아래로 내려갈 게 아니라 이 산 위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믿음은 현실도피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믿음으로 뚫고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시고자,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귀신들려서 간질로 고생하고, 또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자기 아들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나온 아버지가 있었죠.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다른 제자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지 않은 다른 제자들에게 자기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귀신을 쫓아 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제자들은 그 아들을 능치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다시금 간청하는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 앞에서 그 아들의 귀신 들린 귀신들을 즉각적으로 꾸짖고 내 좇아주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하고 물었죠. 그러자 주님께서는 본문 20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말 한 마디로 산을 옮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만일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있다면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큰 산까지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한 것이죠. 그만큼 제자들의 믿음 속에는 그런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도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란 과연 어떤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사실 우리 자신에게도 이와 같은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란, 실은 순수하고 진실된 작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실제로 직경 1m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그 겨자씨에 대해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 그리고 누가복음 13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 겨자씨로 비유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죠. 예수님께서 만약 태산과 같은 큰 믿음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셨다면, 제자들과 우리들은 절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아주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고 크게 응답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겨자씨 한 알의 작은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내딛는 믿음의 작은 걸음을 뜻합니다.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순수한 믿음이 그것이고, 나보다 먼저 가셔서 나를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 된 믿음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마침내 주님께서는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일 새로운 깨달음과 기쁨이 넘치는 귀한 곳들을 다니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엘리야가 견지했던 믿음이기도 합니다. 아합 왕의 통치시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였던 선지자였는데, 그래서 그는 하늘의 불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줬던, 그야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 천하에 알린 대단한 선지자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때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땅에 비를 내리실 것을 믿음으로 선포했죠. 그러면서 자기 사환에게 바다쪽을 바라보라고 말하는데, 처음에는 아무런 징조도 없다고 하자, 7번째까지 계속 올라가라고 명령했죠. 그러자 드디어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났다고, 그리고 조금 후에는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렸다고 열왕기상 18장 45절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태도에 우리는 포커스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입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그만만큼 순수하고 또 절박하고 그마만큼 진실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겨자씨와 같은 한 알의 믿음이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손만한 작은 구름에서 시작한 비구름이 점차 하늘이 캄캄해질 정도로 큰 비가 내렸던 것이죠.
두 번째로 겨자씨와 같은 믿음은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돌멩이는 겨자씨보다 크지만 생명이 없죠. 돌멩이는 자라지도 않고 변화도 없습니다. 하지만 겨자씨는 작지만 생명력이 있습니다. 1mm 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지만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처럼 날마다 자라서 마침내 공중의 새들이 깃들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는 것, 그것이 겨자씨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크냐 적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진짜 믿음인지, 죽어있는 가짜 믿음인지를 보시는 것이죠. 가짜 믿음은 아무리 크고 근사해 보여도 생명력이 없고 능력도 나타나지 않죠. 하지만 진짜 믿음은 생명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해 주시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이 죽어있고 정체돼 있는 믿음인지 오늘 이 시간에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잔 월턴처럼 우리의 호주머니에도 겨자씨를 넣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겨자씨와 같은 믿음, 작지만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를 원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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