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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마태복음 17장 1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여기에서 ‘엿새 후’란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과연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가 어제 읽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한 그 때로부터 엿새 뒤에 흐른 것이죠. 바꿔 말해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곧 황제의 도시에서 제자들과 함께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 각인시켜 주셨고, 그리고 이제 당신 자신이 수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셨고, 그리고 당신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곧 자기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자의 삶임을 천명해주셨습니다. 그런 제자도의 강화사건이 있은 후에 엿새가 흐른 시점입니다.
그 엿새 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높은 산을 사람들은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형체가 완전히 변형되셨기 때문에, 변화산이라고 부르죠.
물론 누가복음 9장 2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혀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시는 동안에 예수님의 외모가 변화되신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도 그렇게 증언해 주죠.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당신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 같이 희어졌다고 증언해 줍니다. 얼굴빛이 너무 눈부셔 쳐다 볼 수 없었는데,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동일하게 빛났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바로 모세죠.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도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 주신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그리고 성막 설계도를 받아서 내려오는데, 그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었습니다. 그의 얼굴 빛 광채가 얼마나 눈이 부시던지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감히 모세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을 정도였죠.
바로 그 장면을 마태가 동일하게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구약의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을 때, 그렇게 얼굴이 해 같이 광채가 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비단 모세나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얼굴과 심령에 주님의 광채가 난다는 것 말입니다. ‘얼굴’이란 ‘얼’과 ‘꼴’에서 온 말로 ‘얼’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데 어찌 그 ‘꼴’에서는 그 분의 얼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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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당신의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에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는 것을 제자들이 봤습니다. 그러자 본문 4절에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여기가 무릉도원, 천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 그야말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지상낙원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환상적인 곳인데, 여기다가 초막 셋을 짓고 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초막을 짓고, 또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각각의 초막을 지어서 아예 이곳에서 살자고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황홀한 경험을 하면 현실 세계의 아픔도 고통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마치 지금 베드로가 그런 황홀경에 도취돼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나섰을까, 우리는 한 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알리시고, 당신의 죽음을 알리신 뒤 엿새 후가 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베드로는 엿새 전에 겪었던 일들, 곧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는 그 고백으로 주님께 칭찬과 찬사를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다고 하실 때에는 ‘비난하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그 일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고 꾸지람을 들었던 베드로였죠. 바로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엿새 뒤에 지금 겪고 있는 이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라면 당연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죠. 차라리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죽음을 당하지 않아 되는, 이런 황홀경에 도취돼 계속 이곳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말입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너무 황홀한 신비세계에 도취되면 내게 주어진 일상의 삶에 소홀하거나 신경도 쓰지 않으려는 ‘딴 세상의 사람’을 원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하면 믿음은 현실 너머의 저 영원한 세상을 갈망하는 삶이긴 하지만 그러나 현실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게 바른 믿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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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5절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들려왔던 소리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하는 음성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뒤에 추가적인 음성이 들려오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바라는 것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자 하지만, 그야말로 현실도피 차원의 삶을 살고자 원하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너희의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순종하라는 음성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음성 앞에 두려워서 엎드렸는데,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서 엎드리는 장면과 똑같죠.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으켜세우시면서 “일어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없었죠.
그래서 본문 9절에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바람이나 제자들의 바람처럼 이 황홀한 세계에 도취된 채 그들과 함께 그 산에서 살자고 하신 게 아니라, 산 아래의 세상으로 내려가자고 하신 것이죠. 믿음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무속적인 게 아니라, 언제나 치열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인 것이죠.
그것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도 똑같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과연 어디로 재림하신다고 성경에 말씀합니까? 교회 예배당 안이나 기도원에 임한다고 했습니까?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0-41) 주님께서 재림하는 것은 삶의 현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면 주님께서 언제 어느 때에 오더라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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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하필 모세의 영체와 엘리야의 영채가 그 산에 나타난 것일까요? 구약의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 아닙니까? 바로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에서, 모세의 영체와 엘리야의 영체가 그 변화산에 임한 것이죠. 이 사실 중에 우리가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죠. 모세는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에 모압 땅에서 이곳 변화산이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본 채 입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죠. 하나님께서 그때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고, 그것으로 자기 임무를 다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죠. 하지만 1천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 모세는 그렇게도 꿈꾸던 가나안 땅을 두 발로 밟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되게 받들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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