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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지역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방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방인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두로와 시돈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나안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었죠. 이른바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구해달라는 하는 간구입니다. 여인은 위험할 만큼 해로운 딸의 치명적인 병세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절망 가운데에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녀가 예수님의 소식을 알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갈릴리 지역에서 온갖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까지 오셨으니, 어찌 나가서 간구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주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불렀던 것이죠.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곧 왕이시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왕으로서 못하실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가나안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만큼 그녀는 고통당하는 딸의 상황을 애끊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갖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조금은 생뚱맞지 않습니까?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그 절박한 여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 않습니까? 다른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곧장 응답해 주셨는데, 오늘 본문은 유독 침묵하시는 모습으로 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놀랍다는 사실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에 그녀는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니까, 그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까? 아니죠. 여인은 계속해서 간청을 합니다. 간청하는 여인의 소리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여인을 빨리 쫓아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보이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요구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녀를 향해 직접적으로 한 말씀 하시면서, 그녀와 관계를 형성하게 시작합니다. 이른바 본문 24-27절의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그녀의 간청에 무반응으로 응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제자들조차 그녀를 쫓아버리기를 원했지만, 주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그게 아니었다는 게 곧장 나타납니다. 뭐랄까요? 그녀가 어떤 반응으로 나오는지 주님께서 한 번 뜸을 들이셨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처음에는 무반응으로 응대했지만, 차츰차츰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믿음을 더 간절하게 드러내주길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개’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개’는 어떤 개이겠습니까? 우리 개역개정판은 단지 ‘개들’로 나와 있는데, 그래서 떠돌아다니는 ‘들 개’ 정도로 생각하기가 쉽죠.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귀나리온’(κυνάριον)으로 ‘a little dog’(작은 개) 곧 ‘애완견’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번역본들은 ‘개들’로 나오지만 공동번역에서는 적절하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며 거절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하고 말하였다.”하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개’는 유대인들이 경멸의 대상으로 사용하던 ‘들개’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안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애완용 개는 주인의 상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상 아래로 쫓겨날 뿐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하죠. 손으로 찢어 먹는 빵과 같은 것을 먹는 일이 많았기에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겠죠.
어쨌든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강아지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설령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덧입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확신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8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오 귀네”(ὦ γυνή)하는 감탄사 ‘오’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 믿음과 겸손함과 또 확신에 대해 주님께서 감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그녀의 요구에 침묵하셨고, 두 번째는 냉정한 말로 무시하셨는데, 그런데도 그녀는 더욱 간절히 주님께 겸손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그래서 마침내 칭찬을 통해 그녀의 간구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녀의 신뢰, 확신, 겸손, 그리고 인내를 포함한 믿음을 주님께서 인정해주신 것이었죠. 그래서 그 흉악한 귀신에 들렸던 그녀의 딸은 그 즉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간구를 안고 주님께 나왔습니까?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드러내기 부끄러워 고민하고 있거나, 아니면 간구해봤자 응답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만약 내가 포기한 간구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주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 29-39절까지는 그곳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랄리 호숫가에 당도하여 산에 오르시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역시 그곳에서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죠. 그 사건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적인 질병까지도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서, 곧 성자 하나님이심을 만 천하에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본문 31절 하반절에 증언해주고 있죠.
그리고 그 이후의 사건은 그곳에 둘러 앉아 있는 수많은 군중들, 본문 32절에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좇아 나온 지 사흘이나 되었다고, 그래서 먹을 것도 먹지 못했다고 증언하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주신 칠병이어의 사건, 보리떡 일곱 개와 생선 두 토막으로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 장정 사천 명을 먹이신 칠병이어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그 사건은 마태복음 14장 13절 이하에서 보여주듯, 주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남자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죠. 주님은 영적인 필요만 채워주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육적인 필요도 공급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죠.
우리의 삶에 진정한 부활의 은총을 맛보고자 한다면, 우리도 가나안 여인의 심령처럼 ‘강아지’와 같은 심령으로, 또한 후반부의 7천명의 사람들 중에 병들고 연약한 자들이 본문 30절말씀처럼 주님의 “발 앞에 앉는” 겸손과 확신과 3일째 함께 하는 ‘인내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죠. 주님을 향한 간절함과 겸손과 확신과 인내의 믿음이 있을 때 주님께서 ‘오 귀네’, ‘오 오클로스’하시면서 놀라운 치유와 회복과 부활의 은총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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