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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마태복음 14장은 크게 세 가지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헤롯 대왕 곧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참수시킨 일이고,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사건,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성경이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왕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죠. 사실 헤롯 안디바는 유대인들에게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입니다.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의 승인을 받아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기는 했지만 현 실권에서 최고권력자입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들을 맘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위치죠. 바로 그와 같은 권력으로 자기 동생 곧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빼앗았던 자였습니다. 그런 비도덕적인 일, 패륜적인 일을 저지른 헤롯의 죄악을 세례 요한은 규탄했습니다. 그러니 헤롯 안디바에게나 그의 새로운 아내가 된 헤로디아에게, 세례 요한은 눈엣가시와 같았겠죠. 마침 헤롯 안디바의 생일잔치가 열렸고, 각처에서 축하하는 하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고, 헤롯 안디바는 자기 권력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도록 했죠. 이상과 같은 사건만 놓고 본다면, 헤롯이 최고요,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언저리에 모여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 권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 왕의 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에서부터 이제 헤롯 안디바와는 전혀 상반되는 사실을 알려주기 시작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세례 요한이 참수당했고, 그 시신을 그의 제자들이 동굴 무덤에 장사했는데, 곧장 예수님께 와서 그 소식을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11장에서 감옥에 갇힌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사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감옥에 갇힌 요한은 정말로 예수님이 자신이 바라는 정치적인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지 제자들로 하여금 묻게 했죠. 그때 예수님은 내가 그다, 아니다, 즉답은 피하셨고, 오히려 내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몰아내는 그런 복음을 베풀고 나누고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바꿔 말해 주님은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오신 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늪에 빠져 있는 이들의 영혼을 건져 올려주시기 위해 오신 영혼의 메시아이심을 천명한 것이었죠.
그런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이 참수형을 당했고, 그의 시신을 돌무덤에 앉힌 후에,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다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까? 본문 2절에 보면 헤롯 안디바 마저도 예수님을 경계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들을 다 듣고 있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는 그런 행적 말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예수님을 좇아 다니고, 가는 곳마다 몰려들어 예수란 자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세례요한의 능력이 저 예수라는 자에게 역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고 증언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헤롯 안디바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자기들이 모시는 스승이 참수형 당해 죽었으니, 이제는 기댈 것이라고는 예수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세례 요한이 못다 한 나라의 희망, 세례요한이 못다 이룬 꿈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그들이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비통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소식을 듣고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이제 곧장 그들을 떠나 배를 타고 따로 빈들에 가셨다고 증언해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수많은 무리들이 다시금 몰려들었고, 그곳에서도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 되어, 다들 기진맥진해 배고파하는 상황인데, 그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남자 장정만 5천 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족히 2만 명은 먹이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왜 이런 기적의 사건을 본문을 통해, 그것도 헤롯 대왕의 세례 요한을 참수형 시킨 그 이후에 즉각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인 헤롯 안디바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심을 만 천하에 알려주기 위함입니다.예수님은 빈들에서조차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이 땅의 주관자요 창조주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사건은 본문 22-33절을 통해 보여주는 ‘물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께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즉시 제자들을 체족’하셔서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 곧 34절의 ‘게네사렛 땅’으로 가게 하신 뒤에, 당신은 ‘따로 산에 올라가신 것’이엇죠.
그런데 제자들끼리 그곳으로 가는 동안 풍랑이 일어나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사이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러자 다들 놀라서 유령인가 싶었는데, 주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베드로가 자기도 걷게 해 달라고 하자,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지만 이내 바람을 보고 물속에 빠져 들어갔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하는, 그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왜 이와 같은 사건을 본문을 통해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의 주관자이심을 만 천하에 알리셨다면, 바다와 풍랑을 잔잔케 하실 뿐만 아니라 바다 위를 걷는 그 사건을 통해, 바다 위에서 빠져 죽어가는 베드로를 건져 올리신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바다의 주관자이심을 만 천하에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있잖습니까? 우리가 본문을 통해 유독 깊이 있게 들여다 봐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번씩이나 강조돼 있는 단어입니다. 13절에 “따로 빈들에 가시니” 또 23절에 “따로 산에 올라 가시니라”하는 단어죠. “따로”란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분명 헤롯 안디바와는 달리 모든 유대인들의 왕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성자 하나님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신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군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을 벗어나 ‘따로’ 빈들로, ‘따로’ 산으로 가신 예수님입니다. 왜죠? 군중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를 더 받들고 순종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의 수요일날엔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행적도 없이 침묵하시며 기도하신 주님께서는, 목요일 오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든 제자들의 발을 친시 씻겨주셨고, 성만찬을 베푸시는 그 현장에 주님의 떡을 받은 가롯 유다는 곧장 자기 할 일을 위해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대하는 시간을 가졌고, 고별설교를 행하신 뒤에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드론 시내란 아버지 다윗을 죽이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죽은 압살롬의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이자, 에스겔 골짜기의 수많은 뼈들이 놓여 있는 곳이라고 했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굳이 그곳을 향해 올라가신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먼저 내다보기 위함이요, 죽음의 잔을 기꺼이 마시기 위해 기도하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셨지만, 제자들은 잠에 곯아 떨어졌고, 주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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