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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곱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들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맥락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서 시작해 미래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이 중 첫 번째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또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라고 알려 있는 비유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뿌린 씨가 떨어진 그 네 가지 종류의 땅”이라는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이 비유를 베푸신 시점과 장소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이 비유를 베푼 시점은 “그 날”(That same day)로 돼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 날”이 과거의 막연한 한 시점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날’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그 날은 12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육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그날이요, 또 그 날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신 그 날, 곧 영적인 가족을 강조하셨던 바로 그 날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가지 비유를 통해 영적인 가족이 누구인지, 또 영적인 천국의 가족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풀어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닷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가시자 많은 무리들이 모였고,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서 앉습니다. 그리고는 해변에 서있는 무리를 향해 말씀하시죠. 그런데 한 번 쯤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바닷가라면 파도 소리가 심하고 바람이 심할 텐데, 어떻게 무리들에게 차분하게 배에 올라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차라리 벳새다 벌판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차분하게 말씀을 전하셨을 것인데, 바닷가 배 위에서 말씀을 전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마이크도 없는 그 시대에 단지 육성으로 말씀을 전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을 우리가 문자가 아닌 현장으로 상황으로 생각한다면, 더 깊은 의미를 캐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은 여러분 각자가 생각해 보는 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네 가지 땅의 부류에 대해 알려주는데,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게 좋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 11-17절에 설명해 주시는데, 요약하면 이 비유에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비유를 통해 복음의 진리가 쉽고 명확하게 이해되지만,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요즘 교회마다 현관문에 “신천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나 딱지를 붙여 놓지 않습니까? 그를 통해 어떤 기독교인들은 너무 편협하지 않냐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하죠. 그들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교회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죠. 첫째로는 이단으로부터 교인들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이미 이단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그들은 더 이상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들도 마찬가지죠.
오늘 본문에서 씨 뿌리는 자를 누구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뿌리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죠. 그 씨를 뿌리는 땅의 부류는 어떤 곳입니까?
첫째는 그 씨가 길가에 떨어졌죠. 본문 4절에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길가란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 진 길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단단히 다져져 있는 곳이죠. 씨가 뿌리를 내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이는 19절에 예수님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로 말씀에 대해 마음이 굳게 닫혀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비유죠.
둘째로 어떤 곳입니까? 5절에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얕은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흙이 얕은 돌밭이기에 씨가 뿌리를 내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내 말라버리죠. 말씀을 참 진리로 인식은 하지만 진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21절에 예수님께서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곧 넘어지는 자요”하고 해석해 주죠.
이것은 종려주일의 수많은 군중들과 똑같은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월요일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21장 10절에서는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온 성이 소동했다”라고 증언하죠. ‘소동하다’는 본래 헬라어 뜻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열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들인데 불과 닷새 만에 어떻게 돌변합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고 야유하며 저주했던 그들이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전부라고 생각했던 까닭입니다.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환란과 박해를 마주하기 싫어한 까닭이죠.
셋째는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졌다고 비유로 말씀하죠. 7절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그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리지는 못합니다. 당연히 열매도 맺지 못하죠.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까닭에 대해 예수님은 본문 22절을 통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그리고 네 번째 땅은 어떤 곳입니까? 그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 곳이죠. 예수님께서는 이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된다”(23)고 풀이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란 무엇보다도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는 바로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죠. 자기 부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엊그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나라, 곧 ‘바실레이라’란 죽어서 가는 천국 곧 지역이나 장소 혹은 영토를 뜻하기도 하지만 주권 통치권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저 천국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받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것이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받들고 순종하는 자가 머잖아 그 영혼이 천국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보여주는 말씀에 따라 순종하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가 백배, 육십배 최소한 삼십배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는 이상과 같인 살펴 본 땅 중에서 어떤 땅에 속한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설령 네 번째 땅이라고 할지라도, 길가도 아니요 돌밭도 아니요 가시엉컹퀴 밭도 아니요 좋은 밭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의 자랑이나 열심히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씨앗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절량의 물과 햇볕이 공급돼야 하듯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100배, 60배, 최소한 30배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햇살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가 그런 열매 맺는 신앙, 하나님 나라의 자녀답게 살 수조차 없다는 것이죠. 바꿔 말해 그나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은 16절의 말씀처럼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보고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신 까닭이라는 것이죠. 오늘도 그 성령님의 깨달음 속에서 좋은 밭에 주님의 말씀을 품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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