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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뒤에, 이제 가이샤랴 빌립보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무슨 말씀을 제자들과 나누십니까? 본문 13-14절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 요한, 어떤 이들은 엘리야, 그리고 다른 이들은 예레미냐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했죠.
세례 요한과 같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고위층에게도 회개의 삶을 촉구하는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이 그런 도덕주의 선지자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죠. 엘리야와 같다는 것은 구약의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곧 우상숭배자 850명과 대결해 물리친 것을 떠올리게 하듯이,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귀신을 물리친 영적인 권세의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전부는 아니었죠. 그 말이 맞았다면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대답을 들으신 뒤, 제자들에게 묻죠. 본문 15절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란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구약의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죠.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 제사장, 선지자, 그렇게 세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았던 바 예수님께서는 만 왕의 왕이시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시고, 예수님께서 참 선지자이라는 것을 함축해서 ‘그리스도’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의 새끼는 개이고, 소의 새끼는 소이듯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본문 17절을 통해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는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너희 인간적인 견해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하늘 아버지 곧 성령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네게 알게 한 것이라는 뜻이죠. 그러면서 너의 그런 반석과 같은 믿음의 고백 위에 ‘내 교회’ 곧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런 고백과 같이 이 세상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매이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위대한 대화의 내용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리고 본문 21절-28절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씀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란 말씀이죠. 그러나 제 3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좀 전에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주님은 만 왕의 왕이시고, 대제사장이시고, 참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던 그 베드로, 성령의 크신 깨우침 속에서 그렇게 고백했던 베드로, 앞으로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성령의 마음으로 늘 풀고 화해하고 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하늘에서도 그런 은총을 베풀어줄 것이라는 그런 격려를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베드로였는데, 그가 어떻게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본문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우리말 ‘항변하다’는 말은 ‘간하다’ 다른 말로 ‘비난하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는 주님 앞에 제자인 베드로가 비난하면서 끼어드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코 그런 일이 미쳐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죠.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좀 전에는 베드로의 그 반석과도 같은 믿음의 고백 위에 ‘내 교회’ 곧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칭찬하셨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사단이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칭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환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영의정 좌의정 자리 하나쯤은 취할 것으로 알고 믿고 있었는데, 만일 십자가에 죽으신다면 자신들의 꿈이 한낱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비난했던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사탄’이라고 칭한 거죠.
그렇다면 우리도 베드로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경계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가 또 사탄이라 칭함을 받게 된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지금 이곳은 ‘가이샤라 빌립보’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헬몬산 기슭의 작은 마을에 거대한 도시를 신설하고서는 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이름인 ‘빌립보’를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로 곧 황제의 도시란 칭호를 붙인 곳입니다. 아무 지역이나 그런 호칭을 붙이지 않겠죠. 두 가지 조건 곧 로마 황제를 모실만한 위용을 갖춘 대규모 도시여야 하고, 도시의 주요 지점에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로마 황제가 지상의 신으로 군림하던 그 지역이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황제의 도시에서 예수님도 남루한 옷을 입고 있고, 제자들도 허름한 옷을 입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세상이 온통 로마 황제를 위한 도시오, 정치와 경제와 금권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저희들만큼은 오직 주님만을 구세주로 섬기겠습니다, 하는 고백과 다르지 않는 고백입니다. 바꿔 말해 이 세상에서 로마의 황제가 모든 것을 쥐락펴락하며 저희들의 생사여탈권까지도 쥐고 있다 하지라도 저희들만큼은 오직 주님만을 끝까지 따르겠나이다 하는 고백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과연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제의 논리, 금권의 논리, 세상 맘모니즘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나의 구주,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이라야 본문 27-28절의 은총을 덧입게 될 줄 믿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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