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요즘 새벽에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말씀은 열왕기하서 초반부입니다.
이른바 열왕기상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열왕기상서의 후반부 마지지막 부분의 핵심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탐욕과 욕망이라는 우상숭배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이었죠.
전반부 1-11장까지 솔로몬의 통일왕국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면 그 후대가 평안할 것이라고 했지만, 솔로몬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죠.
그 후반부인 12-22장까지 분열왕국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후반부 중에 중심인물로 나온 사람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7번째 왕 아합이었죠.
그 아합이 어떤 인물입니까?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자였죠.
그 까닭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과 아세라 신전을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하게 했죠.
그렇게 온 세상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판을 치고 온 세상이 우상의 신전으로 가득한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나요?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알려주고자 엘리야를 보내셨죠.
그래서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3년 6개월간 비가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게 했고, 그대로 됐죠.
또 아합과 이세벨이 돌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할 때 엘리야에게 불의 응답을 내려줬죠.
그리고 비로소 비가 온 내렸는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만 천하에 보여준 사건이었죠.
그런데 그 아합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오히려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죠.
그때 이세벨이 불량배를 동원해 나봇에게 신성모독죄와 왕 모독죄를 덧씌워 돌로 쳐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았죠.
바로 그 무렵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 그가 죽을 것이고, 그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라고 심판을 예언했죠.
그러자 베옷을 입고 회개하는 것 같았지만, 그때뿐이었고, 아람과 전투를 치를 때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했죠.
급기야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과 연합작전으로 아람의 연합군을 맞서 싸우는데, 바로 그때 그가 죽었죠.
그때 엘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심판대로, 그의 피를 개들이 핥았는데, 그곳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죠.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모습을 바라본 그의 아들 아하시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합이 22년간 통치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그 아들 아하시야가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아버지가 걸어간 길과는 달리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열왕기하 초반부에, 그가 다락 난간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오히려 그는 블레셋의 에그론 지역의 바알세붑 신을 숭배하고자 사신을 보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 사신에게 보내, 왕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했죠.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그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자복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군사들을 보내 엘리야를 산에서 체포해 오도록 명령했죠.
그러나 그 군사들을 하나님께서 모조로 불로 심판해 죽이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군사를 보냈는데, 그때도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해 태워버렸죠.
그러자 세 번째 군사를 보냈는데, 그 군대대장은 비로소 엘리야에게 다시 말해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죠.
그러자 엘리야가 그 군대대장을 따라서 아하시야 앞에 나서서 “너는 죽을 것이다.”하고 심판을 선포했죠.
그로 인해 그는 왕이 된지 2년만에 죽고, 그의 동생 여호람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9대 왕으로 오르게 되죠.
(깨달음) 그렇다면 아합의 22년 통치와 아하시야의 2년 통치 기간 동안,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통치자들 너머에 역사와 정사와 권세의 주관자라는 사실이죠.
그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출신도 성분도 전혀 모르는 엘리야를 갑자기 불러 왕과 백성들 앞에 나서게 하셨죠.
물론 엘리야만 활약한 게 아니라 미가야도 선지자도 있었고, 무명의 선지자도 있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선지자들이 활약했죠.
(적용)이것은 오늘날의 시대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도 때로 눈에 보이는 세상을 좇아 살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너머의 주관자임을 우리에게 알게 하실 때가 많죠.
주일날 살펴본 것처럼, 어린 차종규가 조직폭력배 속에 들어갔다가 감옥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도 마찬가지죠.
그가 감옥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 세상 너머의 주관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었죠.
서울대공대를 나오고 미국조지아공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손석제 집사님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외적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지식과 풍족함을 가졌지만, 내적으로는 너무나도 외롭고 힘든 비천한 모습이었죠.
그가 그렇게 낮고 낮은 심령, 비고 비인 심령의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님을 구원자로 모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 빅픽처로 역사하는 살아계신 분이심을 알게 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과 그 일행이 빌립보 첫 성읍에 들어가 유대인 회당이 없다는 것을 알았죠.
안식일이 되자 기도할 곳을 찾아 성 밖 강가의 시냇가로 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죠.
그런데 그 냇가에서 여러 여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 여인들에게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했죠.
그때 그 여인들 중에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여인은 루디아뿐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오늘날로 말하면 고급 모직 원단을 판매하는 여사장이었죠.
그녀는 당시의 소아시아 서부 지역인 두아디라 출신인데, 그곳의 고급 원단을 유럽대륙에까지 가지와 와서 판매하고 있었죠.
그만큼 그녀는 성공과 출세와 부를 거머쥐려고 하는 욕망이 강한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녀는 유대인들로부터 일찍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여성으로서,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만 알고 있었죠.
그런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였죠.
그 냇가에 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유독 그녀만 주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때 그녀가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 일행을 초청하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온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도록 했죠.
그만큼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일을 보는 사람들 모두가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 은혜에 빚진 자로서, 바울 일행에게 자신의 집 거처에서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습니다.
물론 바울과 그 일행은 그럴 수 없다고 계속 만류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도 계속 머물기를 청했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을 때 그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한 것과 같죠.
루디아는 자신에게 베푼 구원의 은혜를 그렇게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섬기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오늘 읽은 본문 16-18절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까?
바울 일행이 루디아 집에 머물면서도 기도하는 곳으로 매번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곳으로 갈 때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는데, 그녀는 자기 주인들에게 이익을 주고 있었죠.
그런데 ‘주인들’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녀를 고용하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시 말해 여러 상전들을 귀신들린 여종을 돈을 주고 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여종이 점을 친다는 것은, 그 여종이 귀신들려 있다는 것은, 그 상전들에게 전혀 상관하거나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 저렇게 몹쓸 귀신에 씌워서, 점을 치면서 저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귀신에게 붙잡혀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들까?”
그 여주인들, 그 상전들은, 귀신들린 여종을 부리는 그녀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 여종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전개) 그래서 그 귀신들린 여종, 곧 그 여종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이 바울 일행을 알아보는 것이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다”하고 말입니다.
문제는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길목마다 그렇게 그 여종이 방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두 번은 참았지만, 계속 그렇게 방해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 귀신에게 이제 말하는 것이었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와라”하고 말입니다.
우리 표현은 고상하지만 그 당시에 그렇게 귀신에게 명령하지 않았을까요?
“이 더럽고 악한 귀신아. 내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빨리 나와”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곧 즉시 나왔던 것입니다.
(본문2)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이어지는 본문 19-24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원해) 바울 일행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좇아 준 일로 그 주인들에게 붙잡혀 장터로 끌려간 상황이죠.
여기에서 ‘장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고라’(ἀγορά)는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기도 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공개적인 법정과도 같은 곳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 일행을 끌고 공개적으로 모욕과 망신을 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관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죠.
바울 일행이 이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더욱이 로마 사람인 우리도 받지 못한 풍속을 전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자 상관들이 옷을 찢기고 매로 친 후에 감옥에 가둬버리는 상황입니다.
(깨달음) 이상이 오늘 읽은 말씀인데 우리에게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몰아내는 것이 그녀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귀신마저도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것이 아님을 빌립보 성읍에 알리고자 한 것이었죠.
바꿔 말하면 아무리 그 귀신이 용하게 점을 친다 해도, 귀신은 귀신일 뿐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 일로 인해 그 여종의 주인들이 몰려들어 바울 일행을 끌고 시장법정에서 세웠고, 급기야 매질을 당해 감옥에 감금돼 버린 상황입니다.
바울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겠습니까?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도 왜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 쫓아낸 것입니까?
오직 귀신을 제압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만방에 알릴 뿐만 아니라 그녀를 자유케 해 주기 위함이었죠.
바로 그것이 자신들을 빌립보 성읍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어드리는 것임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4:18)
서두에 살펴 본 엘리야도 온 세상에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알렸을 때, 온갖 회유와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아합과 아내 이세벨이 죽이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었습니까?
그런데도 엘리야는 아합의 통치 22년간, 또 그 아들의 2년 통치기간, 물러섬없이 담대한 마음으로 선포했던 것이죠.
설령 그 일로 핍박과 환란을 당해도,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이 세상 너머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오늘 너를 통해서도 이 세상의 주관자가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고 싶구나.”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지만, 그러나 나 여호와는 이 세상 너머의 빅픽처로 역사하지 않더냐?”
“빌립보 성읍의 귀신들린 여종을 부리는 그 주인들이 인생주관자처럼 행세하지만 그 너머에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역사가 일어나든 역사가 안 일어나든, 너는 너와 관계맺는 이들에게 기도해주고, 주님의 사랑을 전했으면 좋겠구나.”
“너는 사도 바울이 아니어도 좋다, 너는 엘리야가 아니어도 좋다.”
“너는 너의 본문에 충실하면 된다.”
“너를 통해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받고, 강팍한 자가 돌아오는 것, 그건 네 몫이 아니라 내 몫이니 말이다.”
“너는 오직 바울과 그 일행처럼 네 형편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증인으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너를 통해 역사할 것이니 말이다.”
(찬양)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발췌) 이근호 목사님의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감동 있는 삶〉에 나온 내용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다니던 중에 1977년 미국에 이민가서 회계학을 전공한 후에 목사가 된 이근호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20대 후반에 척추를 다쳐서 10년이 넘도록 척추 디스크로 심한 고생을 한 분입니다.
그때는 왜 척추를 다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더욱이 그렇게 척추를 다친 자신을 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고 택하셨는지,
그러면서도 왜 병을 고쳐주지 않는 것인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43세가 되던 해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에 담당 교수님의 기도를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오랫동안 앓고 있던 그 척추 디스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하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재발되지 않았고 건강한 허리로 힘차게 사역을 감당한다고 합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왜 20년 가까이 하나님은 방치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43살에 고쳐주지 않고 차라리 20대 후반 그 즉식 고쳐주셨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20년 넘는 기간 동안 그분의 심령 속에 깨닫게 하신 게 있었습니다.
병든 사람의 아픔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갖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그 어떤 치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고침받고 깨달은 것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왜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 쫓고자 하는 마음이 불탔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녀를 향한 긍휼어린 마음을 지니고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왜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서 나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합을 향한 긍휼어린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나아갔던 것이죠.
그만큼 오늘 우리 자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도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됐든, 누가 됐든, 어떤 형편과 처지가 됐든, 주님의 긍휼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대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품을 때, 주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내음성)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주님의 그 마음, 영혼을 향해 품는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해 주시옵소서.”
“아합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마음이 주님께서 품으신 긍휼의 마음인 줄 믿어요.”
“귀신 들린 여종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주님께서 품고자 하신 긍휼의 마음인 줄 믿어요”
“저에게 붙여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긍휼로 품게 해 주세요.”
“그때 주님께서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 너머예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이심을 만방에 알려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신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바울 일행을 통해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좇아 자유케 해 주시는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아합을 향해 긍휼을 마음을 품었기에, 바울이 그녀를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었기에, 주님께서 역사하신 일이었습니다.
20년 넘게 척추 디스크고 심한 고생을 한 이근호 목사님도 그 기간 동안 잠잠히 기다리신 것은 타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 그 주님의 마음을 품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누구를 만나든지간에, 어떤 형편의 사람을 만나든지간에, 주님의 그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고 긍휼을 품는 그 마음을 통해 주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펼쳐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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