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의 대적자요 교회의 핍박자이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34살까지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 사회에서 출세하는 것, 산헤드린 의원으로 올라서서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갖기 위함이었죠.
그 까닭에 그는 체포조를 동원해서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감옥에 처 넣고자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길목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정오의 태양빛보다 더 찬란한 빛,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바울에게 찾아왔죠.
왜 하필 바울에게만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함께 체포하려고 갔던 나머지 체포조들에게는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지 않은 것이었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시골 친구 집 부뚜막에 담배맛을 봤던 네 명의 친구들 중에 저만 먼저 불러주신 이유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똑같이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는데, 왜 그 선배는 먼저 데려감을 당했는지, 나머지는 왜 살아남았는지, 누가 알 수 있나요?
똑같이 40세를 넘어서는데, 왜 그는 먼저 데려감을 당하고, 왜 나는 남았는지, 누가 설명할 길이 있나요?
체포조를 동원해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그 길목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만 찾아오신 것도, 설명할 길이 없는 거죠.
오직 주님께서 선택하신 섭리의 일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깨달음)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체포조를 동원해서 함께 다메섹을 가다가 주님께서 찾아와주신 그 은혜를 덧입은 바울이 그 후에 어떻게 했냐는 거죠.
바울은 그 이후부터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아라비아 광야 3년의 경건훈련과 고향 땅 다소에서 7년의 칩거생활을 마친 이후에, 복음전도자로 산 게 그거죠.
(적용)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기들어 있는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 네 명의 친구들 가운데 유독 너만 먼저 선택하여 불러주신 그 은혜에, 너는 빚진 자로 살고 있느냐?”
“나이 50이 넘어 어떤 이는 수술을 세 번 해서 무릎에 통증을 느끼는데, 너는 멀쩡한 그 은혜에 빚진 자로 살고 있느냐?”
“코로나 19로 병상에 누워 있거나, 또 이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는데, 너는 아직 괜찮케 하신 그 은혜에 빚진 자로 살고 있느냐?”
“그 무엇보다도 나이가 많은 때에 너를 부르지 않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너를 부르신 그 은혜에 빚진 자로 살고 있느냐?”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주신 그 은혜로 저와 여려분들을 먼저 선택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에 빚진 자로 사는 삶을 주님은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은 일행과 함께 드로아 항구에서 240km 되는 에게해를 건너 네압볼리 항에 당도했죠.
그 거리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흑산도를 거쳐 가거도에 당도하는 거리보다 조금 더 먼 거리였습니다.
유럽 대륙의 항구 네압볼리에 당도했을 땐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를 따라 16km떨어진 빌립보 성읍에 당도했죠.
오늘날 목포에서 무안 터미널보다 조금 더 먼 위치의 곳입니다.
그곳에 당도한 바울 일행은 수일을 거하면서 유대인 회당이 있는가 찾아봤죠.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성인 10명만 있으면 유대인 회당을 만들었는데, 그토록 그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지 않았죠.
그 까닭에 안식일 되었을 때, 바울 일행은 성 밖의 강가 곧 ‘간지테스 강’ 지류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나 냇가로 간 거죠.
그 계곡과 냇가에 몇 몇 여성들이 있었는데, 바울 일행은 그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죠.
(전개)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대로, 그 여성들 가운데 유독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은 루디아 뿐이었습니다.
대체 그 루디아란 여성은 어떤 여인이었길래, 그녀만 유독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접한 것입니까?
그녀가 믿음이 좋거나, 신앙심이 뛰어나기 때문이었습니까?
(역배2) 그렇지 않았죠.
본래 그녀는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오늘날로 치면 고급 원단을 파는 여사장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오늘날 터키 대륙의 서부지역에 위치한 고대 루디아 왕국에 속한 성읍입니다.
예로부터 염색과 직물 제조업이 발달한 중심지였죠.
더욱이 두아디라에서 생산된 자주색 염료는 최상품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최상류층들만 그 천으로 옷을 만들었죠.
그만큼 루디아라는 여성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대륙까지 건너와 빌립보 성읍에 사업을 벌였다면 대단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녀가 그 사업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겠습니까?
그녀가 유럽 대륙에까지 와서 고급원단을 판매하는 사업을 벌인 이유는 그만큼의 많은 돈을 거머쥐고자 한 까닭이었겠죠.
그만큼 그녀는 부를 취해 남보란 듯이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섬겼던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런 상황에 처한 그녀와, 또 다른 여성들이 그곳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이었죠.
그런데 왜 그녀만 유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였겠습니까?
그녀가 믿음이 좋거나, 신앙심이 남다른 까닭이었습니까?
그녀는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자 한 욕망의 삶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도 출세를 목적으로 살아오다가 주님을 만났는데, 그런 모습처럼 그녀도 부를 통해 출세하고픈 욕망이 있었죠.
그만큼 그녀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믿음이 좋거나 신앙심이 뜨거워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택하심이었습니다.
(주문) 그렇다며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생각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지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바울이 체포조를 동원해 다메섹의 그리스도이들을 체포하러 갈 때 유독 바울만 선택한 것은 주님의 섭리이지 않더냐?”
“빌립보의 간지테스강의 시냇가에서 여러 여성들 중에 루디아만 선택하여 불러내신 것은 주님의 선택이지 않더냐?”
“너희 친구들 가운데, 네가 태어나 자라고 함께 살아오는 사람들 중에 너를 택하신 것도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일평생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신길동 자취방에서 방직공장에 취업해 전기모터나 돌리던 안종혁이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도 주님의 은혜였듯이 말이다.”
“이 세상 가운데 너를 먼저 선택하여 불러내신 그 은혜의 주님께서 2021년 하반기의 삶도 친히 인도해주지 않겠느냐?”
“그러니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온 의지를 다해 순종하는 믿음으로 네가 살아갔으면 좋겠구나.”
(찬양)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문) 그렇게 말로 설명할 길 없는 그 크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루디아가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 15절이 이렇게 증언해 주죠.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원해)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에 의해 그녀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 그녀와 집 사람들 모두가 세례를 받은 것이죠.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사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옛 사람이 죽고, 주님 안에서 부활의 새 사람이 사는 삶이 세례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산 모든 삶이 홍해에서 죽고, 이제는 가나안을 향해 새롭게 부활해 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녀는 세례를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곧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를 청해 자기 집에 들어와 ‘유하라’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유하라’는 헬라어 동사 ‘메노’(μένω)는 ‘체류하다’(to sojourn)는 의미입니다.
며칠이든 몇 달이든 원하는 대로 머물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도 강권하여 머물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여러 차례 사양했다는 뜻이요, 그녀도 계속 강권했는데, 급기야 바울 일행이 그녀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었죠.
(깨달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강권하여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도록 한 것일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선택하여 불러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비진 마음을 갚고자 한 것이었죠.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데, 그런 자신을 물에서 건져내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크나큰 빚을 졌다면서 사례를 하고, 대접을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루디아는 세상의 돈만 바라보며 유럽 대륙을 건너와 고급 원단 장사를 하는 여성입니다.
물론 그 전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해 들어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던 여사장이었죠.
바꿔 말해 그녀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녀 역시도 죄와 사망의 길에서 건짐받을 길이 없는 것이죠.
그런 자신에게 바울의 입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 영생을 선물을 받은 것이죠.
그러니 어찌 그 은혜에 사례하고 픈 마음, 다시 말해 빚진 자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접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그녀가 바울 일행은 극구 강권해서 함께 머물도록 청한 것입니다.
(예화)차종규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교소도에서 주님을 만난 간증집입니다.
1964년 11월 15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석남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죠.
6.25한국 전쟁 때 피난길에 올라 객지를 전전긍긍하다가 9살에 고향에 돌아와 초등학교에 들어갔죠.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버지도 아프니 중학교보다 농삿일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의 외유를 틈타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무작정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죠.
그곳에서 어떤 술집 사장을 만나 심부름꾼으로 일했고,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술집 심부름꾼으로 모은 돈으로 중학교에 다니고자 입학금 30만원을 찾아왔죠.
그런데 같이 일하던 친구가 그걸 가지고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중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그 마음이 싹 가셨습니다.
그 후 징병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다시금 부산에서 와서 체육관에서 일을 했죠.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검정고시를 보려고 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때 체육관 밖에서 으리으리한 승용차 한 대가 왔고, 어떤 사장님이 그를 데려갔죠.
나중에 안 것은 그 사장님은 신 사장니이었고 67세로서, 밀수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보다 나이 많은 어깨들도 20명이나 있었습니다.
처음 그를 데리고 가서 일도 하면서 공부도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쉬운 게 아니었죠.
부산 앞바다에 들어오는 밀수품을 차에다 옮겨싣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조직폭력배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일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그는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감옥을 방문한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말씀을 전하는데 그 심령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 말씀 앞에 말이죠.
그 이후 감옥에 있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예수님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다들 나몰라 했습니다.
심지어 그와 함께 들어온 동료 선배도 괜한데 신경쓰지 말고 출소 이후나 신경쓰라고 했죠.
그만큼 그 교도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소 이후에 다시 그 일에 뛰어들었고, 그로부터 조직에 몸담은지 10년이 흘러갔죠.
그 사이 별도 두 개나 달았습니다.
그런데 시내 모처에서 술자리에 싸움이 벌어져 또다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의 감방장이 성경책을 전해주며 성경을 읽으라고 했는데, 그때 그 말씀이 눈에 들어왔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애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마음이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11:28-30)
그때부터 성경을 읽고, 찬송가도 배워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봐도 청송교도소로 이송될 판이었는데, 결심공판 징역 3년을 선고받았죠.
그야말로 주님의 은혜임을 실감했습니다.
이제 기결수가 되어 교도소 내에 100여 명의 수형자들과 함께 목공 훈련생으로 일을 했죠.
그때부터 쉬는 시간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검정고시반에서 공부했고,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을 했습니다.
출소한 후에는 교도소를 찾아왔던 목사님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고물상 일을 하며 돈을 벌 때 다시금 흥청망청 술독에 빠져들었죠.
그로 인해 간이 망가져 가슴이 조여왔고 장이 뒤틀리는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그 후 고물을 가져오는 일로 싸움이 붙었고, 다시 교소도에 들어갔는데, 그땐 청송교도소에 들어갔죠.
그 당시 청송교도소는 삼청교육대 다음으로 악명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시금 주님 앞에 회개했고, 3개월 후에 작업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만기복역 출소 후에, 나이든 출소자들을 섬기는 전도사님의 교회에 함께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도사 사역을 했고, 목사 안수를 받았죠.
그 즈음 아내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소도 사역을 하는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을 대신해 교도소에 들어가 제소자들에게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해 줄 수 있냐고 말이죠.
그때 그는 아멘으로 응답하며 그 길에 뛰어들어 지금껏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깨달음)왜일까요?
교소도라면 지긋지긋할 것 같은데, 왜 그가 제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을까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도 교도소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 심령이 열렸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만큼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는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에게 그 빚을 갚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주님, 저도 차종규 목사님처럼, 루디아처럼, 바울처럼,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 살게 해 주세요.”
“나를 위해 십자가 피흘림의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
“저도 그 은혜 일평생 잊지 않고 그 사랑에 빚진 자로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베풀며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것이 전도요, 그것이 섬김이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은혜를 덧입혀주세요.”
(찬양)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 1차 2차 전도여행에 나선 것 아닙니까?
루디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바울 일행을 온전히 섬기고자 한 것 아닙니까?
차종규 목사님도 교소도에서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제소자들에게 복음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란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이들에게,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나누고 섬기는 그 사랑에 빚진 자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은 천사를 섬기는 일로 삼으셔서 더욱더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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