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나예)얼마 전에 꿈을 꿨는데, 예전과 다른 꿈이었습니다.
뭐랄까요?
천사나 성령님이 나타나서 내 대신 악한 세력들을 물리친 꿈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예전에는 내 힘으로 해 보다, 힘겹게 물리치는 꿈을 꿨었죠.
그런데 내 힘이나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 천사들이 나서서 해 주니까, 힘이 들지 않았어요.
그 꿈을 꾸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나예2) 작년 초에는 대단한 꿈도 하나 꿨어요.
무슨 꿈인지 언젠가 한 번 살짝 말씀드린 것 같은데, 돼지 꿈이었어요.
시골 집 돼지 우리에 어미 돼지랑 새끼 돼지들이 많았는데, 그 돼지 새끼들이 나가려는 것을 잡아다 넣은 꿈이었어요.
그 꿈을 꾸고, 시골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죠.
“엄마, 나 돼지 꿈 꿨는데?”
“좋든?”
“그럼 좋았지. 복권이나 한 장 사 볼까?”
“무슨 복권아, 목사가 그런 것 사면 쓰겄냐?”
(깨달음) 솔직히 그때 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혹시 압니까?
복권에 당첨돼 대박은 못 나도 뭔가 당첨이 될지?
제가 아는 분은 한 달 한 번씩 지금도 복권을 사는 분이 있습니다.
저도 대학교 다닐 때 후배가 한 장 사 줬는데, 5천원짜리 당첨된 적이 있었죠.
그러나 지금까지 복권은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는데, 작년에는 사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죠.
(적용) 어떻습니까?
내가 꾼 꿈이나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개꿈인지 무엇으로 분별하게 됩니까?
그렇죠.
나의 이성, 나의 판단력으로 분별을 하는 것이죠.
물론 나의 이성안에는 내 감정도 감각도 느낌도 다 작동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어떤 감정이나 감각이나 느낌보다도 오직 이성의 판단을 따르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성으로 분별했을 때, 그 꿈이나 환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내 이성을 다해 순종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내 이성으로 분별했을 때, 그 꿈이나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성경의 말씀에 깨달음도 없고, 마음에 평안도 없고, 주변 사람의 생각도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그만큼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말씀도 깨달음이 오고, 마음에 평안도 오고, 주변 사람들이 공감해준다면, 필히 하나님의 꿈과 환상인 것이죠.
그만큼 꿈과 환상을 분별하는 것도 우리의 이성이고, 그 꿈과 환상에 순종하는 것도 우리의 이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실라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의 끝지점이었던 더베와 루스드라 지역에 들어가 주님의 제자들을 격려했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18살의 디모데를 만나 할례를 시행해 함께 전도대열에 합류하도록 했죠.
물론 디모데가 선교대열에 합류케 된 것은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믿음이 함께 한 것이라고 했죠.
그때가지 외조모나 어머니는 홀로 남은 손자와 아들인 디모데만을 바라보며 살아왔기 때문이었죠.
그만큼 18살의 디모데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에까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소문난 믿음을 간직한 것은 어머니와 외조모의 영향이 컸던 것이죠.
이제 그렇게 세 사람, 곧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본격적으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마음 속에 생각한 목적지는 당시의 아시아 지역, 다시 말해 터기 서남부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죠.
그러자 바울은 일행과 함께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 터기 대륙의 서북쪽 무시아로 올라가 동쪽 비두니아로 진출하고자 했죠.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일행과 함께 무시아에서 비두니아의 반대쪽인 드로아로 내려갔죠.
드로아는 당시에 아시아 대륙 곧 터기와 바다 건너 유럽 대륙을 해상으로 이어주는 주요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드로아 항구에서 밤에 잠을 자는데, 환상 가운데 본 것이 있었죠.
마게도냐 사람들이 손짓하면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는 환상이었습니다.
그것도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꿈과 환상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보인 환상이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 10절은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깨달음) 이 본문을 유심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환상을 본 사람은 바울이고, 여태껏 기록자는 제 3자인데, 여기에 처음으로 “우리가”곧 1인칭 복수형 주어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계속 3인칭으로 기록했다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로 언급했겠죠.
하지만 ‘우리’란 말은 여기에 한 사람이 더 합류한 것이고, 바로 그 사람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 일행이 드로아 항구에 머물기 직전에 또 한 사람이 선교대열에 합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 곧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원 누가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누가는 바울이 선교하기 전부터 그곳 아시아 지역에서 의원으로 일하고 있던 의사였습니다.
그러다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그곳 무시아, 비두니아, 드로아, 그 지역을 거치면서 누가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바로 그 현장에서 주님을 영접한 누가가 그때부터 계속 바울과 함께 선교대열에 합류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 누가는,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최후 순교당할때까지, 그 곁에서 개인 주치의로 함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 누가는 어떻게 누가복음을 쓸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사도행전 16장 이전의 내용들을 쓸 수 있었을까요?
바로 바울을 따라나선 실라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실라는 예루살렘교회의 선지자로서 사도들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예수님의 일대기에 들었을 것 아닙니까?
바로 그 이야기를 선교대열에 합류한 의사 누가에게 하나씩 하나씩 해 줬을 때, 그것을 토대로 누가복음을 썼던 것이죠.
(적용)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까?
지금 내 곁에 함께 하는 성도들의 삶이 성경의 기록이 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행위록 책에 기록될 수 있다는 뜻이죠.
(원성)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역본)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깨달음) 2차 선교여행 때 합류한 누가가 선교여행에서 실라에게 들은 예수님의 행적이 누가복음으로 기록될 정도였죠.
그만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의 행적이, 누군가에게 믿음의 도전장이 되고, 훗날 천국에 기록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의 삶이 그 누군가에게 복음으로 남게 하시고, 하늘나라 행위록으로 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너의 말과 너의 삶이 누군가에게 복음이 되고, 누군가의 생명록과 행위록 책에 남는다는 걸 잊지 말아라.”
“바울의 선교대열에 따라나선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의 삶이 성경은 물론 천국의 행위록에도 기록되지 않겠느냐?”
“더욱이 실라가 사도들을 통해 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누가가 듣고 누가복음을 기록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입술과 네 삶이 누군가에게 복음의 기록이요, 천국에서 귀한 행위록 책이 될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라.”
“남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깍아 내리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으로 화평케 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그것이니라.”
“의사였던 누가도 자기 직위와 명성을 내려놓고 바울과 함께 복음의 대열에 합류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경을 쓰게 하는 상급을 내려주지 않았더냐?”
“네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역자의 삶을 살아갈 때 너에게 하늘 나라의 귀한 상급을 내려주지 않겠느냐?”
(찬양) 은혜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져도 다 주의것이니
세상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아니면 실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주 오직예수 뿐이네
(본문2)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자 하는 바가 또 하나 있습니다.
본문 10절 끝부분을 주목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원해)바울이 마게도냐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봤죠.
그래서 ‘우리’ 곧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그곳으로 건너가려고 배편을 알아보고 여러 경로로 힘을 썼죠.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을 썼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 마게도냐 사람들, 곧 유럽 대륙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말 ‘인정함이러라’는 헬라어는 ‘쉼비바쪼’(συμβιβάζω)입니다.
그것은 ‘-과 함께’(with)를 뜻하는 ‘쉰’(σύν )과 ‘스텝을 맞춰 걷다’(a stepping, walking)는 ‘바시스’(βάσις)의 합성어죠.
그렇기에 ‘쉼비바쪼’(συμβιβάζω)란 ‘하나의 마음으로 모으고 고려하다’(to put together in one's mind)는 뜻입니다.
(깨달음)이것은 바울이 본 환상을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함께 봤다는 뜻입니까?
아니죠.
이 말은 바울이 본 환상을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비록 함께 보지는 못했어도, 하나님의 뜻으로 함께 마음을 모았다는뜻입니다.
(발췌)이채절 목사님의 사도행전에는 주석가 로버트슨이 말한 ‘환상’과 ‘이성’에 관한 부분을 인용한 대목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성은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 준다.
그 계시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발견하게 해 준다.
우리가 그 계시를 이해했을 때 그 계시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해 준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바울이 환상을 봤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자기 망상에서 본 것인지, 무엇으로 분별한다는 겁니까?
바울의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이 본 하나님의 환상을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함께 하나님의 뜻으로 모았다는 것도 무엇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온 이성을 다해 분별하고 온 이성을 다해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순종하게 된 것이죠.
(적용)그렇다면 우리가 꿈을 꾼 꿈이나 환상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꾼 꿈이나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하게 됩니까?
우리의 이성으로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꿈이나 환상은 우리의 이성과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속에 있는 것입니다.
(원성)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런 말씀을 통해 그렇게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원해)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게 하라는 뜻이죠.
바로 그것이 ‘영적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이라는 말이 바로 헬라어로 ‘로기코스’(λογικός) 곧 ‘이성적’(reason)이고 ‘논리적’(logic)이라는 말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는 영적인 것을 대단히 좋아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것은 이성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성을 내 팽개치는 것은 모두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리의 이성을 내 팽개치는 맹신은 인간을 영적으로 미몽에 빠트리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최근에 코로나 19 백신을 저도 맞고, 권사님도 맞고, 집사님들도 맞은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를 맞지 말라며, 666이라면서 음모론을 퍼트린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환상의 계시를 보여줬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비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는 전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전 세계적인 감염병이기에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백신을 맞아야만 차단할 수 있는 것이란 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666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고 연구한 결과, 666은 이단사이비의 괴수요, 기독교지도자들이 정치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이, 666이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들을 두고 666이라면서, 무지몽매에 빠트릴지 모릅니다.
(내음성)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무지 몽매한 자예요. 그래서 말씀 앞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해 주세요.”
“그래서 꿈과 환상이 보일 때, 말씀에 입각한 우리의 이성으로 분별하게 해 주세요.”
“지금도 백신을 666이라면서 맞지 않으려는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런 어리석음에서 속히 빠져나오게 해 주세요.”
“바울에게 보여준 환상을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자신들의 이성으로 판단해 함께 뜻을 모으고 순종해 나갔습니다.”
“오늘 저희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함께 모으고 순종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온 이성을 다해 순종하여 영광돌리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아니면 실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주 오직예수 뿐이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실 자체가 누군가에게 복음의 씨앗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뱉는 말과 삶 자체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록과 더불어 행위록 책에 기록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말한 입술과 삶이 행위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고, 성경으로 기록케 한 것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여 꿈과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지만 우리의 이성으로 분별케 하십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상황도, 앞으로 다가올 적그리스도나 666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갖고 하나님의 꿈과 환상과 계시를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에 순종하여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누군가에게 참된 복음의 씨앗이 되게 할 것이요, 하늘나라의 행위록에 기록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온 이성으로 순종하는 그 삶에 하늘 상급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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