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이 현재 독일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본래 독일에 유학을 갔는데, 10년이 넘어서면서,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최근에 그 목사님이 교단 총회에 맞물려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교단 총회를 마쳤으면 독일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 목사님은 한국에 잠사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부모님이 함평에 있는 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이죠.
함평에 있는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부모님의 안부를 들여다보고 살펴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깨달음)목회하고 선교하는 자식이, 부모님 앞에 자식의 도리를 한다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법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그 후배 목사님은 그 부모님 슬하에 독자입니다.
독자로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셨으니, 얼마나 갈등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 목사님이 기꺼이 목회자로 나설 수 있는 것은, 그 부모님이 기꺼이 떠나보냈기 때문이죠.
그 부모님이 그 목사님을 당신들의 품에서 떠나보내지 않았던들, 그 목사님이 어찌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독일에서 목회는 그 외동 아들 목사님도 훌륭하지만, 그 부모님 역시 훌륭한 것이죠.
(적용) 우리 김순라 권사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큰 아들이 있으니, 그래도 권사님은 위안을 삼을 수 있고, 왠지 든든한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모든 부모님은 자식들이 장성하면 떠나보내는 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다만 떠나보내되 무엇을 위해 떠나보내는지, 바로 그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돈과 성공만을 위해 장성한 자식을 떠나보내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진리를 위해 떠나보내는지 말이죠.
그리고 부모님 품을 떠나는 자식도, 자기 성공과 출세를 위해 떠나는 것인지, 그에게 닥쳐올 삶에서 진리와 생명을 위해 떠나는 삶인지 말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1차 전도여행지의 첫 도착지이자 자기 고향인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지의 끝지점인 더베 지역과 그 앞선 루스드라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곳 루스드라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그곳은 유대인 회당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들이 거의 없던 지역, 그야말로 헬라인들 곧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었죠.
그러니 바울 일행이 1차 전도여행때 그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 회당이 아닌 길거리에서 전했죠.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 1차 전도여행때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였던 사람을 주님의 능력으로 고쳐주는 통로가 된 것이었죠.
그때 그 성읍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바나바를 최고 신 제우스로, 바울을 제우스의 전달자 헤르메스로 섬겼죠.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는 헬라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일 뿐입니다”하면서 옷을 찢었죠.
“지금 이 역사를 이룬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여러분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에요”하고 말렸죠.
그런데 곧이어 문제가 터지고 말았죠.
그 앞선 지역의 이고니온과 그 이전 지역의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좇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을 선동했고, 그들의 선동에 넘어간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쳐죽였죠.
졸지에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바울은 그들에 의해서 성밖에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그 사명을 다할때까지 죽게 하는 법이 없기에, 다시금 바울을 살려내주셨죠.
바로 그때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 성읍에 들어가 주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 성읍을 떠났죠.
바로 그때 주님의 복음을 영접한 사람, 피투성이가 된 바울이 위로하고 격려한 그 현장에 있던 이가 디모데였습니다.
물론 디모데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도 그 현장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와 외조모는 유대인이었지만, 외조모도 일찍 남편을 여의였고, 헬라인 남편을 둔 어머니도 일찍 사별했죠.
그러니 어린 디모데는, 어머니와 외조모의 신앙과 함께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어머니와 외조모는 디모데가 어렸을때부터 성경을 읽어줬고, 말씀대로 살도록 당부했겠죠.
그런데 그때까지도 유대인의 율법만 따랐던 어머니와 외모조와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때, 율법을 뛰넘는 진리와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접한 것이었죠.
그리고 지금 2차 전도여행을 통해 바울이 4년만에 다시 루스드라에 나타났으니, 디모데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본문) 그런데 2차 전도여행때 나타난 바울은 1차 전도여행때처럼 단지 복음을 전하고자 함이었습니까?
아니죠. 오늘 본문 3절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원해) 여기에서 ‘그를’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디모데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함께 2차 전도여행의 동역자로 떠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의 입장에서, 아니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외조모에게도 남편이 없는 상황이고, 어머니 유니게에도 헬라인 곧 이방인인 남편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그 외할머니나 친어머니는 누구를 의지하며, 누구에게 기대며,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왔겠습니까?
당연히 디모데가 세상에 성공해서 자신들의 남편 없는 설움도 이겨내고, 그 디모데에게 기대고픈 마음이었겠죠.
그런데 지금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떠난다’는 헬라어 ‘엑제르코마이’(ἐξέρχομαι)는 ‘앞으로 나가다’는 뜻입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루스드라 성읍을 박차고 제 2차 선교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깨달음) 그가 떠나가는 결단을 내리고 싶어도 홀로 계신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가 보내지 않는다면요?
그는 결코 떠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디모데가 그 당시 18살 나이에 기꺼이 바울의 동역자로 2차 선교대열에 합류코자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기꺼이 떠날 수 있도록 보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디모데의 믿음은 그 홀로 세워진 믿음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까닭에 바울은 훗날 자기 죽음을 내다보며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 노배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격려한 바가 있죠.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적용)디모데가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루스드라 성읍에 나두고,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의 믿음이 함께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도, 나 홀로의 믿음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처럼, 그런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부분입니다.
(본문2) 그런데 디모데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데, 그냥 떠나지 않고, 무언가를 행한 게 있습니다.
그것이 실은 더욱 중요한 부분이죠.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깨달음)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그냥 떠나지 않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할례란 유대인들이 태어나면 8살 때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베는 것으로 오늘날 포경수술과 같죠.
그런데 디모데는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 곧 이방인이기에, 루스드라 성읍에서는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욱이 바울의 할례관에 비춰봐도, 여태껏 무할례주의자가 바울이었습니다.
사실 그 할례 때문에, 안디옥교회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쌓인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헬라인들, 할례와 무관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는데, 그곳에 할례파 유대인들이 침투해 들어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어지럽혀 놓았죠.
그 문제로 인해 급기야 예루살렘 1차 공의회를 통해 매듭을 짓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 할례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말이죠.
다만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의 입장을 생각해 음행이나 우상앞에 제물을 바치거나 죽은 짐승의 피는 먹지 말도록 했죠.
그렇게 해서 할례 문제를 일단락 지어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와서 다 보고를 한 바울이었죠.
그런데 왜 지금 바울이 굳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직접 행해서, 2차 전도여행에 데려가는 것이겠습니까?
(근성) 그것은 본문 4-5절 말씀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깨달음) 바울이 디모데에게 굳히 할례를 시행한 이유, 그것도 18살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앞으로 다녀갈 성읍 곳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혹시라도 만날 수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기꺼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왜냐하면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때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올 경우에는 할례를 시행치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주님앞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맞는 관습도 존중해 주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해 바울이 디모데엑 할례를 시행한 것은 구원을 위해서 할례를 행한 게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2차 전도여행길에 만날지도 모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접촉점, 소통의 장을 넓히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죠.
(적용)우리가 주일날 살펴본 방언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충만하여 하게 된 방언은 천사의 언어가 아니었죠.
그때 그들이 행한 방언은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로 알아듣는 인간의 언어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창한 외국어를 했겠습니까? 그들이 그때 이후에 계속적으로 그 외국어를 썼겠습니까?
아니죠. 비록 그들이 유창하지 않는 외국어였고, 계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왜 그 외국어를 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 그릇을 키워 외국 사람들과도 소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한 마디로 말해 복음의 장을 넓힐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리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인 셈이죠.
물론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모두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포용하고 수용하여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주님의 사람으로 섬기는 마음 자세를 보여주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땅 끝은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땅끝은 내 심령의 땅끝, 내 심령에 더 큰 소통의 장이 넓혀져야 하는 것을 말하죠.
지금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율법을 벗어나 있든지, 그 모든 이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복음을 품도록 하기 위함 말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그렇죠. 주님은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더 큰 소통의 장을 넓히길 원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성령님의 감동감화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바울이 데모데를 데리고 떠날 때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기꺼이 떠나보주지 않았더냐?”
“디모데의 믿음은 홀로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의 믿음이 함께 한 것이지 않더냐?”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떠날 때 그냥 떠나지 않고 할례를 시행하여 더 다양한 사람들과 복음의 접촉점을 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너의 자녀들에게 참된 믿음의 어머니, 신실한 믿음의 할머니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너의 신앙심을 너의 자녀들과 너의 손주들이 참되게 닮도록 말이다.”
“더욱이 너의 자녀들이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세상의 성공과 출세만을 위해 나가기보다 진리와 생명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갔으면 좋지 않겠느냐?”
“믿음의 큰 그릇으로, 복음의 큰 그릇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수용하며 사랑의 그릇이 되도록 말이다.”
“오늘도 그 성령님을 의지하며, 디모데처럼 그런 마음의 그릇, 땅끝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찬양) 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독일에서 목회하는 그 후배 목사님은 함평 요양원에 계신 그 부모님을 남겨두고 곧바로 독일로 떠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기꺼이 선교지를 향해 떠날 수 있는 것은 그의 부모님이 여전히 그를 떠나보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들아, 가지 말라. 나는 네가 이제 않 나갔으면 좋겠다.”하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아들의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기 싫어하셨을 하나님 아버지지만, 굳이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 위함 아니셨습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떠나고자 할 때, 디모데가 기꺼이 함께 따라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 아니었겠습니까?
어린 디모데가 2차 선교대열에 합류한다고 할 때,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기꺼이 떠나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신실하고 복된 믿음을 갖고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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