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나예) 예전에 충주에서 부목사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새벽차량 운행부터 저녁까지 열심을 냈었죠.
그때 너무 열심히 했는지 몸살을 앓은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신기한 만남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무슨 만남이었겠습니까?
충주시 이승민 내과 의원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제가 몸살을 앓거나 기운이 빠질 때면, 링거를 하나씩 놓아 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몸살을 앓고 기운이 빠져도 그 노란 수액을 맞으면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죠.
모두가 성령님께서 좋은 만남을 베풀어주신 일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아내 덕분에 목포에서도 한의원 한 분을 그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포역 근처에 있는 박성철 한의사 선생님입니다.
1년 전부터 허리가 아프거나 발목이 아플 때면 그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았을 때, 제가 목회자인 걸 알고, 그때부터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또한 성령님께서 선한 만남의 길을 열어주신 줄 믿습니다.
(깨달음) 그런데 어디 그런 만남 뿐이겠습니까?
제 육신을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도 소중한 만남이지만, 함께 예배하는 권사님과 집사님들은 더 좋은 만남이죠.
왜일까요?
인간의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만남이요, 성령님께서 열어주시는 은총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오늘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갖고 받아들야 할까요?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걸 결정하는 것 같지만, 그 너머에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구나, 하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죠.
만약 내가 걷는 길이 악한 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만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성령님께서는 그 길을 막으시거나, 그 만남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피하고 싶어도,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원하신다면 기필코 그 길로 인도하는 분이시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을 맞아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그 위쪽을 향해 걸어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갈라디아 남부지역이자 제1차 전도여행 지역의 마지막 지점이던 더베와 루스드라를 향했죠.
1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루스드라에서 선천성 앉은뱅이를 고친 놀라운 일도 있었지만, 바울이 돌에 맞아 죽는 일도 있었죠.
그 일은 루스드라 이전의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찾아온 유대인들이 선동해서 당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바로 제1차 전도여행 때 피투성이를 당해 죽었다가 살아난 그곳 루스드라를 찾아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받아들인 주님의 제자들을 격려하고자 했는데, 그곳에서 누굴 만났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곳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죠.
디모데는 당시에 18살로 추정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 까닭에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지로 나가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당시 디모데에게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가 함께 살고 있었죠.
그만큼 디모데가 2차 선교여행지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의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라고 했죠.
그의 믿음과 더불어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이 디모데의 심령 속에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바울이 디모데를 데려가고자 할 때 그렇게 말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디모데야, 네가 떠나면 우리는 어떻게 사냐? 여태껏 너만 보고 왔는데 말이야.”
그렇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디모데의 발목을 잡았다면, 디모데가 선교대열에 합류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디모데가 선교대열에 기꺼이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보내줬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그만큼 디모데의 믿음도 훌륭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믿음도 더더욱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권사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6-10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전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이제 아시아로 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아시아란 오늘날의 아시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터기 데륙의 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령님께서는 바울 일행이 당시의 아시아 지역, 오늘날 터키 서부지역으로 나아가는 걸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의 영도 바울 일행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데도 허락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그 당시의 항구 도시인 드로아에 갔을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보였죠.
마게도냐 사람, 곧 당시 유럽 대륙 사람들이 바울 일행에게 “우리에게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라”하는 환상이었죠.
그때 바울이 무엇을 깨닫습니까?
“아, 나는 아시아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 유럽 대륙의 사람들에게 가라는구나”하는 것이었죠.
(깨달음) 그렇다면 본문 속에서 바울 일행을 이끄는 이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6절에는 ‘성령’으로 나와 있고, 7절에는 ‘예수의 영’으로, 또 10절에는 ‘하나님’으로 나와 있습니다.
바울 일행을 이끄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도, 또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은 누굴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영’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서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만 계신 게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적용)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바울 일행, 곧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인도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중에서도 성령님께서 그들의 전도여행 길을 주도적으로 주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습니까?
바울이 아시아 지역, 터기 서부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지만, 성령님은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유럽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통해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유럽 대륙에 복음의 관문이 열리도록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더 큰 세계인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전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시아 지역만 고집했다면 바울은 유럽 대륙의 사람들, 곧 세계인들을 품는 마음까지 확장되지 못했겠죠.
우리 주님은 그만큼 바울의 인생길을 친히 주도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이 더 큰 세계인의 마음을 품도록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길도 친히 주도하셔서 더 큰 세계인의 마음을 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충주에서 이승민 의원을 만난 것도, 목포에서 박성철 한의사를 만난 것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니더냐?”
“바울이 지금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성령님은 그 길을 막으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지 않았더냐?”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 국한된 마음만 지녔지만, 성령님은 유럽대륙을 품는 세계인의 마음을 품도록 허락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모든 만사의 때와 환경과 상황과 길목까지도 너의 하나님께, 예수의 영에게, 성령님께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아무리 가고자 해도 그 길이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면 막으실 것이지 않겠느냐?”
“네가 아무리 원치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기어코 너를 이끌지 않겠느냐?”
“그러니 모든 인생의 길목을 전능하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성령님께 친히 내어 맡기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성령 하나님은 네가 세계인의 마음을 품도록, 너의 인생길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 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화) 바울은 자기 일행과 아시아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지만, 예수님의 영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영 곧 성령님께서는 그 일행을 유럽 대륙 곧 세계인의 마음을 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주일날 살펴본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충만한 모습도 마찬가지 아니였습니까?
120명의 제자들이 그날 성령충만함 속에서 방언을 했는데, 그 방언은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의 언어였죠.
그런 방언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외국어를 세련되게 하느냐 못하느냐?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느냐 못 구사하느냐? 그건 중요치 않았죠.
오직 세계 16개국에 온 사람들과 바디 랭귀지를 할지라도. 그들을 품고 수용하고 섬기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죠.
그런 마음없이는 세계인의 마음을 지닐 수도 없고, 그런 마음이 없이는 온전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깨달음) 그만큼 예수의 영, 곧 성령님께서는 언어의 소통을 통해, 세계인의 마음을 지니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를 기반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요, 언어를 기반으로 마음까지 얻길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랜즈 대학에서 기도 응답에 대한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죠.
45명의 사람들이 각각 15명씩 A.B.C그룹으로 기도응답 실험에 참여했다고 말입니다.
그 중에 어떤 그룹이 놀라운 치료 효과를 봤다고 했습니까?
세상의 심리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1주일에 2번씩 기도하러 나오는 사람들과 기도하면서 교제를 갖을 때였죠.
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우울증도, 편두통도, 말더듬도, 궤양증상도, 간질증상도 좋아졌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바울 일행에게 세계인의 마음을 품도록 하신 것과 동일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곳만 가고자 하는 것은 성령님이 원치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내 상각은 내려놓고, 타인을 수용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맺을 때 그 속에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신 것이죠.
(원성) 그래서 이사야 55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해 주지 않습니까?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적용)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는, 예수의 영은, 성령님께서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고자 하는 길목보다 더 넓은 세계인의 길을 열어주시고가 아시아의 길을 막으신 것이었습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연약한 자예요.”
“저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내가 원하는 길만 가고자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자 해요.”
“이런 어리석은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또 사람도 만나도록 인도해주세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제가 제 인생을 바라보는 것보다 위에 계신 주님께서 훨씬 더 잘 보고 계실 줄 믿어요.”
“바울이 내다보는 길목보다 훨씬 더 위에서 바라보신 주님, 저희들의 인생길도 그렇게 역사하실 줄 믿어요.”
“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인의 마음을 품게 하셨듯이, 저희들도 그런 세계인의 마음을 갖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샘에 와서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고 풍성한 은혜로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충주에서 이승민 내과 원장을 만난 것도, 목포에서 박성철 한의사를 만난 것도, 내가 생각지 못한 주님의 섭리이죠.
그렇기에 때로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가고자하는 길만 좇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 선한 길을 열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내 눈에만 보이는 세계를 넘어 세계인을 품는 그런 그릇이 되도록, 우리를 친히 인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때 바울이 생각지도 못한 마게도냐의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우리게도 우리가 생각지 못한 놀라운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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