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2021년 전 세계 인구는 78억 7,496만 5,732명입니다.
그 중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주로 영접하여 사는 크리스천은 몇 명이나 될까요?
2020년 전 세계 그리스도인 인구를 33%로 추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78억 가운데 기독교인 숫자는 30억명 정도 되겠죠.
여기에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물론이고, 가톨릭 신자도, 성공회 신자도, 구세군도 포함되는 숫자죠.
그런데 2천년 전에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얼마나 됐을까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요?
그야말로 우물에서 숭늉찾기 정도로 그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겠죠.
어찌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 시내에 99.9%는 모두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겠죠.
예루살렘 시내의 99.9%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다면 겨우 12명의 제자들, 더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승천을 목격한 500여명의 형제들이 전부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을 받고자 기도하던 무리들은 120명 뿐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99.9%에 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전혀 무관한 인생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들 그 당시에 헤롯 대왕과 빌라도 총독이 쥐고 있는 권력을 최고로 여기는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도 아니면, 주님을 믿기 전 삭개오처럼, 어떻게 하면 로마에 세금을 덜 납부하고 자기 주머니를 채울 것인지, 거기에 관심을 두던 사람들이 태반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21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 인구의 30%가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2천년 전에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주님께 관심을 두셨기 때문이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좇아 살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예수님을 알고 눈여겨보셨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은 그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구주로 영접하여 살도록 하나님께서 주님을 높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을 각자의 구주로 영접하여 살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그 심령에 내주하시고 충만케 해 주신 것이죠.
(적용)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우리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4천만이 넘는 사람들 중에, 목포시 인구 20만명 가운데, 나를 알고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돈 내 팔촌, 초중고대학 동창들, 그리고 교회 성도들 정도, 나를 알고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포시 인구나, 대한민국 전체 인구 가운데, 99.9%도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목포시장이나, 목포의 국회의원이나,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조금 더 많이 알 수 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다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고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당신의 자녀들, 그런 당신의 제자들을, 알아보시고, 기억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셨고, 그런 삶을 사셨기에,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그 분을 구세주로 세워주신 것이죠.
우리의 삶도 미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고 알아보시면, 우리의 삶도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2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때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 위쪽 남부 갈라디아 지역을 향해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때 첫 방문지는 1차 전도여행의 끝 지점인 더베와 루스드라였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향했죠.
그 후에 밤발리아에 도착해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당도했죠.
그 후에 이고니온을 거쳐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을 옮기면서 복음을 전했었죠.
그런데 그 1차 전도여행지의 끝지점인 더베 앞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루스드라 성에 들어갔을 때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 공개적인 길에서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를 만났죠.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그를 치료해주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통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그 전부터 그리스 신들을 믿고 있던 터라, 바울과 바나바를 그 신들처럼 떠받들고자 했죠.
그때 바울은 우리도 사람에 불과하다며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만류했죠.
그런데 이전에 들렀던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을 선동했죠.
이른바 바울과 같은 자를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너희들의 돈벌이가 안 될 것이라고 선동하고 현혹케 한 것이었죠.
그 말을 들은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돌로 쳐 죽여버렸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거반 죽은 상태였는데, 사명자는 죽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시 살아났죠.
그리고는 다시금 루스드라 성읍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그 인접한 더베 지역으로 갔죠.
그곳 더베를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 찍고, 고향 다소도 있었지만, 곧바로 역주행하면서 원점으로 돌아왔죠.
(깨달음) 바울은 실라와 함께 바로 그 아픈 현장이 있던 곳,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그곳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죽음의 고비가 트라우마로 다가올텐데, 그래서 그곳을 피하고 싶을텐데, 왜 바울은 갔을까요?
오직 성령님께서 그곳으로 보내시고 인도하셨던 까닭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싶어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원하셨기에, 기꺼이 순종했듯이 말입니다.
(적용)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나는 정말로 원치 않는 일이지만, 때때로 성령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맞출 필요가 있는 것이죠.
설령 그 길에 내 영광과 내 이름값이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기꺼이 나를 내어드리는 것 말이죠.
처음에 그것을 하도록 성령님이 감동을 주셨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드런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라도 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지닌 가장 큰 차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름값이 들어가야 기부를 하고 생색을 내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도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나를 헌신하는 자들이죠.
그런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은 몰라줄지라도, 우리 주님은 그런 자를 알아주시고, 기억해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본문) 바울이 실라와 함께 마지막 1차 전도여행지였던 더베에 갔다가 곧바로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죽음의 현장과도 같은 루스드라에 곧바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본문 1-2절에서 뭐라고 증언해줍니까?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깨달음) 바울과 실라가 루스드라 성읍에 들어갔을 때, 만난 사람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났다고 증언해줍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디모데의 나이를 15-17세 정도로 추정을 합니다.
어찌 보면 소년에 해당되는 나이 아닙니까?
그런데 뭐라고 소개를 합니까?
‘디모데라 하는 제자’라고 소개를 하죠.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라고, 다시 말해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남편은 헬라인이라고 곧 이방인이라고 소개를 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나이가 어리지만, 루스드라에서도, 또 이고니온에서도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라는 거죠.
왜 그렇겠습니까?
소년에 해당하는 젊은이가 한 지역에서 칭찬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성실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동네나 한 지역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까지 칭찬을 받는다면, 너무나도 신실한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적용)그런데 디모데는 어떻게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어머니, 디모데후서 1장 3-5절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도 그리스도인으로 나오는데, 어떻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 1처 전도여행 때 그 성읍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디모데의 가족 식구들이 주님을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부분의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이 헬라 신을 신봉하는 그 성읍에서, 어떻게 디모데 식구들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만큼 바울이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그곳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오늘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의 씨를 뿌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적용2)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루스드라 성읍은 그 당시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 로마 제국의 속국 가운데 가장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대로마 제국 내에 살고 있던 로마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속국 가운데 그렇게 작은 마을이 있다는 것은 누구 하나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의 정조가 한양에 있던 정약전을 흑산도로 유배를 보낼 때, 한양 성읍에 살던 사람들 중에 누구 하나 흑산도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렇게 초라한 시골 마을에 사는 디모데를,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누구 하나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를 알고, 그를 눈여겨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의 선교대열에 합류하도록 하신 주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우리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자들은 주님께서 알아주고 기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성령을 통해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2천년 전 로마제국 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 중에 루스드라 성읍에 살고 있던 디모데를 누가 알고 있었겠느냐?”
“누가 디모데에게 관심이나 가졌겠느냐?”
“그 시골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정치 권력과 돈줄에 다들 목숨을 내맡기며 살려고 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그들의 눈에 디모데가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
“하지만 주님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 신실하게 살고 있던 디모데를 알고, 눈여겨보지 않았더냐?”
“예루살렘 사내에 99.9%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관심을 쏟아부었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외롭거나 고독하다고 쓸쓸하다고 낙심하지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너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힘들어하지 말아라.”
“오직 주님을 경외하기 위해 예배하고, 주님 나라를 위해 네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너를 주님이 알고, 주님이 인정해주지 않겠느냐?”
“루스드라 시골 마을 사람들은 디모데에게 관심조차 쓰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디모데를 알고 눈여겨보시며 살펴주지 않았더냐?”
“오늘도 주님은 너를 향해서도 그와 동일한 관심과 사랑을 쏟아붓고 지켜보지 않겠느냐?”
(찬양) 약할때 강함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주 주나의 모든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수 없네 주 나의 모든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발췌) 이채절 목사님이 서울 정신여고 강당에서 ‘주님의교회’를 개척하여 10년간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당신은 10년만에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때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 자립하지 못하고 있던 그 교회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날라갔죠.
물론 가족들과 네 자녀들을 데리고 간 게 아니라, 자립하지 못한 교회 여건에 맞춰, 홀로 가셨습니다.
당시 핸드폰이나 인터넷 상황도 좋지 않은 때라, 한국의 가족들과 연락을 하려면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도 당장 구할 수 없어서 한 달이 넘게, 다른 방에서 지내야 했죠.
더욱이 스위스 가운데 제네바는 그야말로 루스드라 성읍처럼 당시에 작은 지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존 칼빈은 그곳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지만, 그곳 제네바는 그때도 초라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목사님을 들어 외국의 한인들을 불러모아 주님의 복음을 듣고 소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깨달음) 그 목사님은 그야말로 작은 성읍에서 목회하는 분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통해 전 세계적인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신 셈이었습니다.
마치 디모데는 작은 루스드라 성읍에 사는 소년이었지만, 우리 주님께서 그를 알고, 그를 눈여겨보셔서, 그 지역과 인근 지역까지, 그리고 이후에 세계 선교의 대열에 합류하는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신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적용)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돼 있고, 유튜브와 블로그와 트윗과 페이스북이 너무나도 발달돼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전파를 타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환경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우리 자신도 연약할지라도,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도구 삼아 전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내음성)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너무나도 작고 연약한 자예요.”
“이 세상 앞에 내놓을만한 게 하나도 없고,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자에요”
“하지만 주님, 이 세상 사람들은 저를 몰라줄지라도, 주님만은 저를 알아주시고, 저를 기억해 주실 줄 믿어요.”
“이 땅에 사는 목적을 주님께 두고 있고, 주님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하며 살고 있는 저를 알아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부족하지만, 이 선한 마음 끝까지 간직하며 주님 나라를 위해 루스드라의 디모데처럼 살게 해 주세요.”
“그래서 천국으로 저희를 부르실 때, ‘착하고 충성된 아들아, 딸아, 내가 너를 알고 기억한단다.’하시면서 격려해주실 줄 믿어요.”
(찬양) 십자가 죄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나의 모든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년 전 예루살렘 시내에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1도 못됐습니다.
그 당시에 99.9%의 사람들은 예수님과는 무관하게 이 세상의 성공과 정치권력과 돈줄에 목숨을 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생명을 내놓으셨던 주님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기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30% 이상의 사람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크리스천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은 주님에게 무관심하고,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주님을 알고 기억하고 계신 까닭입니다.
로마제국의 속국 가운데 루스드라 성읍도, 그 성읍의 디모데도 누구 하나 관심갖고 지켜보는 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신실하게 살고 있는 디모데를 주님은 알고 계셨고, 지켜보고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오직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기억해주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세상은 너를 모를지라도 나는 너를 알고, 너를 기억한단다.”하는 주님의 격려와 상급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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