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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행16:11-15)

by 똑똑이채널 2021.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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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나예)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 담배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때였죠.

그래서 시골 친구의 옆집 부엌에 들어가 네 명이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배를 입에 대 본 순간이었죠.

그날 호기심으로 한 모금을 빨아봤는데, 그때 콜록콜록한 그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 그 다음부터 입에 대지 않았죠.

그또한 주님의 은혜였지 않나 싶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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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를 포함해 네 명의 친구가 그날 호기심으로 담배 한 모금을 빨았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네 명의 친구들 중에 중고등부를 거쳐 청년기에 이르까지 저 혼자 주님을 믿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다른 세 명의 친구는 모두 주님과 무관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그 중에 두 명은 어두운 세계에 몸을 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두 명의 친구 중 한 명은 주님을 영접하여 천안의 교회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방법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 그런데, 왜 하필 나였을까, 왜 하필 그 네 명의 친구들 중에 나를 먼저 불러주셨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뭘 잘랐거나, 신앙심이 좋거나, 그런 게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선택하심 밖에 달리 생각할 없습니다.

 

그것은 제 큰 형님의 친구분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몇 달 전에 제 큰 형님의 호적을 정정해서 법원의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법무사를 통하지 않고, 제가 직접 서류를 준비해서, 허락을 받은 판결이었으니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서류를 준비하면서 두 명의 친구 인우보증서가 필요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문뜩 자기 간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또래 중에 정말로 똑똑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가고자 하는 대학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목포해양대학에 시험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더 똑똑했던 그 친구는 목포해양대학에도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합격됐으니,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더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였네요.”하고 말이죠.

물론 그 형님도 지금은 주님을 믿는 분이라,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랬을 거야, 하고 말씀하죠.

 

(적용) 바로 그런 이치 아닙니까?

어렸을 때 저수지에서 같은 수영을 하다가 왜 그는 데려감을 당하고 왜 나는 살려주셨을까?

나이 40이 넘어가면서 왜 그 친구는 데려감을 당하고 나는 살려남겨두셨을까?

같은 또래 친구들 중에 왜 먼저 나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셨는가?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로 설명할 길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인 주님의 섭리요, 주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를 데리고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해안가 네압볼리에 당도했죠.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는 항로로 직선거리가 250km였습니다.

목포에서 뱃길로 흑산도를 지나 가거도까지 가는 길보다 조금 더 걸리는 거리입니다.

바울은 자기 일행과 함께 그 당시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사모드라게에서 갈아타고 네압볼리까지 간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뱃길로 적어도 5-7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니, 얼마나 막막하고 또 두렵기도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직 바울 일행이 그 뱃길에 자신들의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죠.

믿음이란 각자의 이성으로 깨달은 바를 온 의지를 다해 순종으로 완성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 일행인 그런 믿음으로 네압볼리에 당도했을 때, 곧장 그들이 걸어간 곳이 어디였습니까?

해안가 네압볼리에서 16km 내륙에 위치한 빌립보 성읍이었죠.

목포에서 무안 터미널까지의 거리 정도인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울 일행은 이그나티아가도를 따라 그렇게 걸어간 것이었죠.

 

그때 그들이 처음 당도한 빌립보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그곳은 주전 356년 그곳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 2세가 자기 이름을 따서 거대한 도시로 지은 곳이죠.

그때 빌립보로 명명했는데, 주전 167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을 당했고, 146년엔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에 편입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그곳 빌립보 성읍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르투스와 카시우스의 연합군과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이 주전 42년에 빌립보의 계곡에서 전투를 벌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존엄자’라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게 되었죠.

바울 일행은 바로 그런 역사적인 빌립보 성읍을 찾아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전개)그런데 바울 일행이 안식일이 돌아오는 날까지 그곳 빌립보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유대인 회당을 찾아다녔죠.

왜냐하면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도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죠.

 

지금 2차 전도여행 때 유럽 대륙의 첫 성읍인 빌립보를 찾아 안식일을 맞이할 회당을 찾은 것도 그런 연유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인 10명만 있으면 회당을 마련해 모임을 가질 수 있었죠.

그런데 그곳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전혀 없었을 정도로, 유대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에 바울 일은 더 이상 유대인 회당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식일을 맞이해 기도할 곳을 찾아나아갔죠.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성읍의 바깥에 있는 강가였습니다.

 

(본문)본문 13절에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원해) 여기에 나오는 ‘강가’로 번역된 헬라어 ‘포타모스’(ποταμός)입니다.

그 뜻은 ‘냇가’(stream, 눅6:49), ‘홍수’(flood, 계12:15), ‘강’(river, 막1:15, 요7:38)으로 번역이 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강이 ‘간지테스 강’ 지류로서, 그 강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나 냇가로 추정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루디아가 자주색 옷감 장수였으니, 그곳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빨래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죠.

 

중요한 것은 바로 그곳에 모인 여자들에게 바울 일행이 ‘말을 했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을 했을지 우리는 상상하고도 남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본문2)그런데 더욱 중요한 말씀이 14절에 나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원해) 바울이 일행과 함께 그곳 냇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누가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죠.

오늘날로 말하면 ‘두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 여사장 루디아입니다.

 

‘두아디라’는 오늘날 터키 대륙의 서부지역에 위치한 고대 루디아 왕국에 속한 성읍입니다.

예로부터 염색과 직물 제조업이 발달한 중심지였죠.

더욱이 두아디라에서 생산된 자주색 염료는 최상품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최상류층들만 그 천으로 옷을 만들었죠.

그만큼 루디아라는 여성이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대륙까지 건너와 빌립보에 사업을 벌였다면 대단한 사업가였던 거죠.

 

그런데 그런 그녀를 수식하는 말이 또 있죠.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은 백부장 고넬료처럼, 이방인이지만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을 소개받아 믿고 있던 여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녀가 하나님을 믿고 있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알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죠.

 

(깨달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일행과 함께 그 냇가에서 루디아를 포함한 다른 여성들에게도 함께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여성, 곧 루다아만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죠.

 

더욱 중요한 것은 14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바울이 그 냇가에 모여든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곳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에 귀를 기울인 여성은 루디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여신 분, 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따르게 하신 분이 누구란 뜻입니까?

 

주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신 것이죠.

 

(성화) 이 모습을 볼 때 가장 감격해 할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바울 일행 가운데, 바울 자신이 가장 감격했겠죠.

 

왜죠?

이미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죠.

똑같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체포조를 동원해 다메섹 길을 가던 바울이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10명 이상은 함께 대동했던 그 길목이었죠.

 

그런데 그때 그날 정오의 태양빛보다 더 밝은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누구에게 찾아오셨습니까?

그 10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유독 바울에게만 부활의 빛이신 주님께서 찾아와 불러주셨죠.

지금 그때 그 시절의 바울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 앞에 오직 그 한 사람, 루디아라는 여성 의류업체 사장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때 네 명의 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유독 저를 먼너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은혜처럼 말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그렇죠.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먼저 불러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지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2천년 전 바울이 10명이 넘는 체포조를 동원해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때 누구에게 먼저 찾아왔더냐?”

바울이 일행과 함께 유럽 대륙의 빌립보 성읍의 냇가로 갔을 때 그 여성들 중에 누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더냐?”

바울과 함께 한 10명이 넘는 이들 중에 유독 바울에게 먼저 찾아와 불러주신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더냐?”

루디아와 함께 한 여성들 중에 유독 루디아에게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이 세상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너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을 네가 믿고 있느냐?”

너의 어릴적 손꼽놀이하는 친구들 중에, 너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생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너를 먼저 불러주지 않았더냐?”

그 모든 게 네가 잘나고 능력이 있고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님을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왜 그는 버려두고 너를 먼저 불러주셨는지, 왜 그는 데려감을 당하고 너를 살려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는지 말이다.”

오직 그것은 주님의 특별한 섭리요,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지 않더냐?”

바로 그 은혜를 네가 기억한다면, 2021년 하반기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전적으로 내어 맡길 수 있지 않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너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의탁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 분이 홀로 큰 일을 행하시고, 그 분이 홀로 홍해를 가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이다.”

 

(발췌)안종혁 교수의 〈길갈〉은 그 자신의 죄와 수치와 슬픔을 주님께서 다 굴러가게 해 주신 간증을 기록한 책입니다.

전남 보성 출신인 그분은 첫돌이 지난 3개월 만에, 자신의 아버지를 여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사촌형을 부르지 못해서 “혀, 혀, 혀, 형...” 할 정도로 말더듬이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더듬이 때문에 오히려 논리력과 표현력과 사고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죠.

 

다행히 초등학교 5학년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나, 그분의 칭찬과 격려로 인해 말더듬이도 졸업했고, 공부로 잘했죠.

중학교 때는 10km나 떨어진 거리의 학교, 왕복 20km를 걸어다니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후에 전주공업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하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전기배관공으로 첫 직장생활을 했죠.

그때 몇 년동안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변압기나 전기모터를 수리하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어머니도 서울 신길동에 와서 장로교회에 자진해서 나가, 새벽마다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6개월의 대체 군복무를 잘 마친 그는, 1975년에 인하전문대학 야간부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는 인하대학교 전기공학과 3학년에 편입해,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을 했죠.

그 무렵 숙명여대 교육학과 출신의 자매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LG그룹의 신입사원 공채에 합격했죠.

 

그런데 그렇게 대기업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데, 어머니가 서울대학 교수요원을 뽑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니, 거기에 합격한다면, 함께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자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당시 서울대학에서 교수요원을 뽑는 그 시험에 응시하는 이들이 다들 내노라하는 대학출신들 아니었겠습니까?

그 혼자 방직공장 출신에다, 전문대학 출신에다, 야간학부 출신으로 응싱한 것이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기한 방법으로 그를 합격시켜주셨고, 그때부터 코가 꿰서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었죠.

 

그러다가 미국 유학의 꿈을 꾸고, 1986년, 32살의 나이에 아내와 상의한 후에, 아이들 남매를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당시 다른 것은 다 좋았는데, 토플 점수가 550점 나와야 되는데, 그것이 몇 차례 늦어지는 것이었죠.

그러니 그때처럼 그가 간절히 기도한 적이 언제 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토플 점수가 정작 나왔는데, 가고자 한 곳과 다른 곳도 다 막혀버렸고, 다행히 조지아택대학에서 허가를 받았죠.

당시 조지아택 대학의 Y라는 믿음의 형제가 그 대학의 입학 사정위원장을 찾아가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유학을 오게됐다면서 설명을 잘 해 준 덕분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Y라는 믿음의 형제가 나가던 교회 동료들이 훗날 믿음의 길로 인도해줬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박사과정을 하는 그 유학 중에 주님께서 꿈에 불체험, 곧 성령체험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공학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 분에게 말이죠.

더욱이 박사과정을 해야 하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에 8시간씩 성경을 읽어나가는 은혜에 빠져들었습니다.

더욱이 10년넘게 피던 담배, 그걸 끊지 못해 P집사에게 여러번 창피를 당했던 담배, 그것도 주님 은혜로 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교회 대학원부에서 회장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믿음의 학우들을 섬기는데, 박사학위 예비시험에서 세 번이나 낙방한 것이었죠.

그러니 실망에 빠져, 언제나 주일이 시작되는 밤 12시에 모든 일손을 놨는데, 그때는 주일새벽까지 공부에 매진했죠.

그런데 그 주일날 갑자기 허리가 아파하고, 도저히 시험을 치를 수가 없어서, 박사학위라는 욕망을 포기하며 주님께 맡겼죠.

그리고는 주님께 항복하는 의미로 3일 금식하면서 주님께 나아갔는데, 네 번째 그 시험에 합격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문제는 그렇게 합격은 했지만, 지도교수에게 쫓겨나,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멤스(Micro-ElectroMechinical System, 미세전자기계시스템)이른 MIT에서 온 교수 밑에 연구조교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한국에 있는 아이들도 다 데려와 함께 살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새로운 모터의 구조와 아이디어를 주셨고, 담당 알렌 교수도 그걸 제작해 보라고 했죠.

그렇게 몇 달을 매달려 개발했는데, 정작 그 마이크로모터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성탄절 간증집회를 끝내고, 새벽 2시에 그 연구실에 들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했죠.

그런데 신기하게 예전과 똑같은 환경, 똑같은 마이크로모터였는데, 그날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멤스 국제학회에서 최우수발표자가 되었고, 그걸 계기로 IBM왓슨연구소 박사후과정도 하게 되었죠.

 

(깨달음) 그런 과정을 살아 온 그가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과학과 공학을 논하는 가설과 증명방법들이 존중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모든 과학과 지식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속에 운행되는 것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었죠.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지성과 영성을 분리하고 있지만, 그는 지성과 영성이 주님 안에서 통합돼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중요하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개발한 멤스 곧 미세전자기계시스템의 마이크로모터가 돌아가는 그 원리는, 실은 방직공장에서 전기모터를 수리할 때 배운 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적용)그러니 그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힘들고 어려운 과정과 코너로 모실 때, 다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왜 방직공장에서 전기모터나 수리하며 일하게 했는지, 왜 그때는 다른 직원들보다 월급이 왜 그렇게 적었는지 말이죠.

 

더욱이 1994년 11월부터 신시내티대학 전자공학과 종신교수로 부임했는데,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최하점을 줬죠.

하지만 학부에서 전과목 A를 받아 수석으로 졸업한 최우등생이 그를 지도교수로 삼는 이변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그가 박사과정졸업논물발표회 때 지도교수인 안교수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까지 고백했다는 점이죠.

 

그러니 왜 자신이 박사과정 예비시험에 세 번씩이나 낙방하게 되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깨달은 것이었죠.

지금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함께 예배하는 사역도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과정 하나하나가 주님의 세심한 배려였음에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드리는 것을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안종혁 교수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를 저에게도 베풀어주고 계심을 믿어요.”

왜 그렇게 방직공장에서 전기모터를 고치며 힘들게 일하며 살게 하셨는지,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요.”

왜 그땐 박사과정 예비시험에 세 번씩이나 떨어졌고 믿음을 시험하셨는지,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요.”

그때는 참 힘들고 고달팠지만, 지금은 돌이켜보면 모든 게 주님의 섭리요, 은혜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고 있어요.”
왜 그때는 사도 바울과 함께 한 일행을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이끄셨는지,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요.”

왜 그때는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 안식일에 냇가로 가게 하셔서, 그 여성들 사이에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는지,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요.”

주님, 저를 사랑하시지만 때때로 힘든 과정이나 코너로 모실 때도 있는데, 그때는 잘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하실 줄 믿어요.”

“2021년 전반기에도 그런 은혜와 사랑으로 저를 이끌어주셨는데, 2021년 하반기의 삶도 그렇게 인도해주실 줄 믿어요.”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주님께서 바울 일행을 ‘간지테스 강’ 지류 냇가로 보내셨는지, 왜 그곳의 여성들 가운데 루디아의 마음 문을 여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주님의 섭리요, 주님께서 전적으로 선택하신 역사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들도, 어릴적 친구들 중에, 함께 살아온 동기동창생들 중에, 왜 나를 먼저 선택해주셨는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있겠습니까?

그 모두가 주님의 전적인 선택이요, 은혜임을 깨닫는다면, 2021년 하반기에도 어떤 삶이 펼쳐지더라도, 주님께서 전적으로 내어맡기며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요?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루디아의 마음을 여실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2021년 하반기의 삶도 주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먼저 택해주시고, 불러주신 그 주님께서는, 2021년도 하반기의 삶도 친히 책임져주시고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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