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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요즘은 시대가 달라져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노아가 살던 시대에 자식은 가장 큰 재산이죠.
그것은 아브라함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 시다에 자식이 없으면 가장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언제 자식을 낳았습니까?
그의 나이 500세가 지나서였죠.
그러니 노아가 5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수치와 모멸감을 받았겠습니까?
그때 문벌 좋고 학식 좋고 가문 좋은 사람들이 왜 세상을 주름잡지 않았겠습니까?
그 속에서 자식이 없던 노아는 얼마나 많은 수치와 수모를 겪었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죠.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죽고 나서 외롭고 고독에 쌓일 때 그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죠.
더욱이 창세기 11장 30절에서는 사라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부른 것이죠.
그런 비천한 상태에 처한 아브라함을 불러 구원해주시고 자식을 낳게 해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나일강에서 이집트 왕자로 구출 받았지만 나이 40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전락했죠.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80살 노인이 될 때까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장인의 양을 치는 자로 살았죠.
한 나라의 제국의 왕자로 살다가 광야에 묻힌 인생으로 처박혀버렸다면 그 인생은 끝난 자 아닙니까?
모세는 처가에 얹혀살았으니 돈과 재산이 한 푼도 없는 자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하나 밖에 없는 그 노인 모세를 불러서 당시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는 바로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깨달음)그렇다면 노아가 잘나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모세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신명기 7장 7절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게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보다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택하신 이유는 그 당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 가장 작고 비천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세상 나라에 하나도 내세울 게 없는 미천하고 가난하고 작고 연약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의 강한 자 지혜로운 자 능력이 있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적용)그 사실을 이스라엘 민족이 안다면, 그 사실을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가 안다면, 어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능력이 있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까?
아니죠.
어떤 면에서 보면 더 무능하고 더 무식하고 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자 사랑에 기인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구원이나 믿음이나 은사를 결코 자랑할 길이 없는 것이죠.
오직 자랑할 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과 은혜 안에 사는 것, 그걸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입니다.
기적을 구하는 일은 굉장히 화려해 보입니다.
내가 그런 기적을 체험했다고 사람들에게 간증할 때 굉장히 은혜롭습니다.
또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이성을 강조할 때 그런 사람들이 대단히 멋지고 위대해 보이죠.
그런데 바울은 어떤 예수를 전했다고 말합니까?
왕관을 쓰신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온 천하를 호령하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를 전한다고 하죠.
십자가는 노예나 죄수들이 사형당하는 형틀 아닙니까?
그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분이라면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자로 여겼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헬라인들은요?
헬라인들은 지혜와 지성과 사상을 최고로 여기는 자들 아닙니까?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도는 야만적인 모습이요 어리석은 모습일 뿐이지 결코 구원의 모습일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4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녀들은 십자가가 생명과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 외에 구원과 영생을 누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오직 그 길만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지혜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 지혜가 아니죠.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자에게만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고백한 것이죠.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바울의 역설법입니다.
하나님이 약해지거나 하나님이 미련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죠.
그 어떤 인간의 지혜로운 방법보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깨달음)바울이 지금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어서 십자가의 도 앞에 하나가 되고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죠.
(본문)오늘 읽은 본문은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26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원해)‘형제들아’ 하는 헬라어 원어는 ‘아델포스’(ἀδελφός)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를 통해 태어난 형제 자매를 말하는데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한 가족된 형제를 말하는 것이죠.
이 ‘형제들아’하는 말은 이미 10절에서도 언급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한 참 지적하다가 ‘형제들아’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참 지적하다가 계속 지적하지 않고 한 번 뜸을 들이면서, 우리는 주님안에서 형제 자매들 아니냐, 하고 말하는 것이죠.
그만큼 바울은 자기 감정을 조절하고자, 자기 판단의 생각을 전환하고자, ‘형제들아’하고 진정하면서 부르는 것이죠.
내가 내 감정에만 치우치면 상대방의 감정에 상처를 주기 마련인데, 주님의 마음으로 한 형제 자매된 마음으로 지금 바울이 부르고 있는 것이죠.
더욱이 헬라어 원문은 ‘보라’하는 ‘블레포’(βλέπω)라는 단어가 맨 먼저 나옵니다.
육신의 눈으로 뭘 보라는 뜻이 아니라 심사숙고해 보라는 것이죠.
무엇을 심사숙고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심사숙고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잘 나서 능력이 있어서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냐,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것 아니냐,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셔서 구원받은 것 아니냐, 그걸 심사숙고해보라는 거죠.
(깨달음)그리고 ‘육체를 따라’하는 헬라어 ‘사르크스’(σάρξ)는 ‘몸’(flesh)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대비되는 죄로 더렵힌 인간 본성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대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 아무리 지혜롭고 문벌이 좋고 가문이 좋아도 그걸 자랑할 게 있겠느냐,하는 것이죠.
(적용)그만큼 고린도교회 안에 그런 세상 지혜와 문벌과 가문과 학식으로 주님의 구원안에 들어온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죠.
또 교회 밖에 있는 자들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학벌좋고 가문이 좋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죄와 사망을 해결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전개)그래서 바울이 27-29절 통해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해)여기에 ‘택하사’는 헬라어 ‘엑클레고마이’(ἐκλέγομαι)는 ‘오직 하나님 자신을 위해 뽑아내다’(choose out for one’s self)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이지 그 동기가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미련한 것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하고 능력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택하셨다는 것이죠.
여기에 ‘부끄럽게 하다’는 헬라어 ‘카타이스퀴노’(καταισχύνω)는 ‘욕되게 한다’(to dishonour, disgrace)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고 약하고 어리석다는 사람을 택하셔서 구원으로 뽑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서 굉장히 가진 게 많고 그 가진 걸로 내 인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생명이 끝나고 보니까 자신이 업신 여긴 사람이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걸 보니까 그것 자체가 모욕으로 밀려드는 것이죠.
그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 자,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적용)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선택하심 분도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를 핀셋으로 뽑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결코 나의 믿음이 좋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죠.
내가 지금 죄와 사망의 이 세상 한복판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세상 수많은 사람가운데서 나를 영적인 핀셋으로 뽑아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구원받은 것을 결코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성도들 앞에서 더더욱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개2)그래서 바울이 30-31절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같이 읽어보실까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깨달음)무슨 말씀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인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너희들이 자랑할 게 있느냐, 하는 뜻이죠.
너희들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너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다고 여기는 것, 그 모든 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더냐?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그런 것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 은사가 최고라고 자기 파벌이 최고라고 여기는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죠.
그것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들이라면, 그저 너희들이 자랑으로 그친다면 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하는 거죠.
(적용)그래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구약성경 예레미야 9장 23-23절을 인용해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지성이나 직위나 가문 같은 것들을 자랑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할 것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데 내가 보이고 내가 드러나겠습니까?
오직 주님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분열하고 다투는 것들이 모두 너희들 잘 나고 능력있다고 자랑하는데서 비롯된 것 아니더냐?
그러나 너희들에게 거룩함과 의로움과 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이지 않더냐?
그렇기에 교만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겸손하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예화)로마에 가면 바티칸 성당이 있습니다.
흔히 베드로 성당이라고 부르는 곳이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로마에 가면 베드로 성당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뭘 보고 느끼겠습니까?
그저 그 성당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반하고 돌아오는 것 뿐이겠습니까?
아니죠.
2천년 전 베드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로서 자랑할만한 게 하나도 없었죠ㅗ.
베드로가 무슨 지혜나 학벌이나 가문을 자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2천년 전 로마 제국 시대에 그야말로 갈릴리의 변방 어부에 지나지 않던 사람이었죠.
더욱이 갈릴리도 자신들은 갈릴리 바다라 불렀지만 호수에 지나지 않았죠.
그토록 비천하고 무식한 베드로였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날 베드로 성당에서 베드로가 존귀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그 바티칸 성당 곧 베드로 성당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얼 느껴야 할까요?
내 주머니에 있는 것, 내 학벌과 가문과 능력을 자랑해야 할까요?
아니죠.
그것들은 나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하죠.
2천 년 후에, 아니 죽음 이후에 나를 지켜주고 나를 존귀하게 해 줄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자랑이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부름을 받은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 나의 자랑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주님 안에서 겸손하게 살게 하시사 존귀하게 사용하는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 때 자랑할만한 게 무엇이 있었느냐?”
“500세가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고 아브라함도 그때까지 무자했고 모세도 나이 80이 될 때까지 가난하고 늙은이이지 않았더냐?”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자식을 낳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지 않더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벌을 만들고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는 모습들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까닭이지 않더냐?”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었다면 결코 자랑할 게 무엇이 있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난 자라면 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한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나된 것은 다 주님의 은혜로 고백한 바울처럼, 네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어떤 형편에서도 겸손한 자로 사는 것 말이다.”
“2천년 전 베드로는 자기 지혜도 없고 가문도 자랑치 못한 변방의 어부였지만 그토록 세상에 부끄러운 자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셔서 베드로 성당에서 칭송받는 자로 남게 해 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오늘 네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더욱더 겸손한 자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자랑하는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결코 자랑할 만한 게 아무런 것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식을 낳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벌을 만들고 자기 은사를 자랑하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서 떠나 있는 까닭 아니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영적인 핀셋으로 나를 선택해 주신 그 은혜 앞에 겸손하게 응답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교만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자랑하며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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