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성화)새벽기도회때 마태복음 12장을 살펴보는데 거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말씀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한 표적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구원받고자 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준다면 그것으로 꼬투리를 잡고자 한 것이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말씀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지내다가 다시 살아난 표적을 말씀한 것이죠.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표로 말씀한 것이었죠.
(적용)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크리스천 중에는 표적과 기적만을 좇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병에서 고침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의 척도로 삼으려는 신앙인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도다’하고 말씀할 정도였죠.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병에서 고침받고 기도응답을 받는 것은 중요하죠.
그러나 그때 나와 예수님 사이에 믿음의 관계가 형성이 됐다면 그 후부터는 표적을 좇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신앙인이 돼야 하는 것이죠.
물론 그와는 반대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지식이나 자기 사상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달달달 외우고 있거나 성경을 토대로 자기 사상을 구축한 이들이 말이죠.
하지만 말씀을 달달달 외우고 있거나 자기 사상과 철학을 세운다 한들 그것이 말씀과 무관한 삶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표적이나 지식을 좇는 신앙인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을 진정한 구원으로 여기며 그 복음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지난 시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열을 일삼는 성도들을 향해 사랑의 질책을 쏟아내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신 이유를 설명했죠.
주님께서 바울을 고린도교회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이죠.
그렇다고 바울이 세례를 폄하하기 위해서 말한 게 아니었죠.
세례를 본질을 추구하도록, 곧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세례의 본질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자면 그들이 애굽을 빠져나와 홍해를 건넌 뒤에는 다시는 뒤로 돌아가지 않는 삶을 말하는 거죠.
그때부터는 애굽을 향해 뒤로 후퇴하는 삶이 아니라 가나안 땅 곧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의 자기 자랑 자기 업적 자기 능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가능한 삶이죠.
바로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요,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고린도에 보낼 때 그렇게 죽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만큼 복음은 단순한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버리는 삶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손과 발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누군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 누군가 복음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입술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손과 발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일구는 삶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와 같은 십자가의 삶, 그 복음의 삶을 고린도에 살아온 것처럼, 너희들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권고한 것이죠.
(적용)그것은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죄의 소욕을 좇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좇아 사는 것 말이죠.
그것은 한 번 그렇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아니 주님 재림하실때까지, 끊임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때에만 우리 삶에 복음의 향기가 날 수 있기 때문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9-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에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시 말씀은 바울이 이사야 19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과 총명한 자들을 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 세상에 지혜자들이 똑똑해 보여도 그 지혜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다 한들 동남아 지역에 강타한 쓰나미 앞에서 그게 소용이 있었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어느날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자기 총명으로 버터낼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지혜와 총명은 유한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걸 일깨우고자 ‘멸한다’, ‘폐한다’는 말을 헬라어 원문에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폐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라, 하는 뜻이죠.
더욱이 20절의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할 때 ‘세상’이란 단어는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코스모스’는 ‘질서’(harmonious arrangement)를 뜻하는 말이죠.
이 ‘질서’라는 말이 나중에 ‘우주’라는 의미로 바뀝니다.
인간들이 정한 시간과 절기, 해와 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모든 질서를 우주로 확장해서 숭배하고자 한 것이죠.
그러나 그런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 편에서 얼마나 가소로운 것들이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시간이나 절기, 해와 달과 별들이 인간을 구원해주는 게 아니죠.
그런 것도 모른 채 그것들을 숭배하고 우주라고 여기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강조한 것도 이 세상 지혜로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들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하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처럼 어리석은 인간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셨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전도’란 예수 믿으십시오, 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십자가 구원의 능력 곧 복음의 내용까지 말하는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능력을 알았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주는 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전도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전개)바울은 왜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2-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원해)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표적’을 가리키는 말은 헬라어로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인데 복수로 기록돼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들만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표적을 구하고 체험을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병이 낫는다, 기도했을 때 응답을 받는다면, 하나님이 전설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삶에 현존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죠.
그때부터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한 번 표적을 보고서 자꾸자꾸 표적만 좇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표적 자체만을 좇는다면 표적이 없으면 실망하고 신앙이 병들고 이단에 빠지게 되죠.
그래서 칼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 자체에 빠져 기적에 경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기적에도 만족하지 않고 매일 끊임없이 새로운 기적들을 찾아 헐떡거렸다.”
유대인들은 기적에 걸린 들린 것처럼 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는데,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제한돼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앞을 보고 있지만 뒤는 볼 수가 없고, 내 몸 속을 알지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모르죠.
외과 의사도 남의 속을 들여다봐야 할지만 자기 속에 암 덩어리가 있는지 모르죠.
그만큼 본다는 게 대단한 것 같지만 태양처럼 큰 것도 미세먼지보다 작은 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것은 실은 안 믿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도마야 보지 않고 믿는 게 복되다”하고 말씀하셨죠.
‘도마야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바로 형성돼 있으면 보이지 않아도 다 믿을 수 있지 않느냐?’하는 뜻이죠.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돼 있다면 그때부터는 표적을 좇아 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의 삶을 사는 데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죠.
(원해2)유대인들이 그렇게 표적들을 헐떡거리며 살았다면 헬라인들은 무엇을 찾아 헐떡거렸을까요?
헬라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지혜를 ‘찾으나’라고 돼 있죠.
‘찾다’가 헬라어로 ‘제테오’(ζητέω)인데 ‘끝까지 집요하게 추적한다’(to seek in order to find)는 뜻입니다.
(깨달음)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란 인간의 이성과 철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구원이 자리할 틈이 있겠습니까?
자기 이성 자기 철학 자기 논리를 최고로 치는 사람들은 그걸 깨트려야 구원의 은혜를 임하는 법이죠.
그래서 최고의 수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을 통해 그의 지혜와 철학을 깨트려서 구원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었죠.
그처럼 유대인들은 기적에 걸신이 들려 있고 헬라인들은 이성과 철학을 신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본문 23절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2천 년 전 로마제국 시대에 사형수를 못 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하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꺼려한 것이죠.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단정한 거죠.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No’하고 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 곧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볼까요?
지혜와 철학과 사상을 좇는 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기 짝기 없어보이는 것이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24절을 통해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지금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꺼립니다.
헬라인들은 그들의 지혜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미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요 지금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25절을 통해 그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의 위대한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약해지거나 미련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미련해보여도 인간의 가장 똑똑한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약한 것이 인간의 가장 강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무엇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비록 십자가를 무시한다해도 헬라인들이 십자가를 어리석게 생각한다해도 너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오직 십자가를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여기고 온전히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것이고, 주님의 연약한 십자가가 오히려 세상의 강한 것보다 훨씬 복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십자가의 도가 없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를 위해 고린도에 파송되어 산 것 아니더냐, 하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도를 세상의 자랑으로 삼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거죠.
(주음성)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삼고 있느냐?”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고 있지는 않느냐?”
“그러나 네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지 않더냐?”
“유대인들은 표적들만 매달려 살고 헬라인들은 자기 지식을 최고로 여기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큰 것이 되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 보이는 것, 표적, 지식을 자랑거리로 삼지만 너는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가장 귀한 능력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느냐?”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는 치욕이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원받은 너에게는 가장 큰 능력이요 생명이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네의 죄를 대속해 주시려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말이다.”
“오직 너는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며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좇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지금도 이 세상에 죽어가는 사람들 중에 십자가 복음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를 위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그를 위해 너를 십자가에서 구원한 것 아니더냐?”
(찬양)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표적이나 기적을 쫓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표적이니 기적이 없어도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관계를 더 깊이하는 신앙인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십니다.
성경지식을 많이 알고 있거나 자기 지식을 최고로 여기는 이들도 주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거리일뿐 주님은 말씀 앞에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십자가 삶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유대인들이 꺼리고 헬라인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십자가의 복음 아닙니까?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이들이 늘고 있으니, 우리가 마지막까지 전해야 할 복음도 십자가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걸 자랑삼고 전파하는 복음전도자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 속에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수요설교WednesdaySermon >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고전2:1-5) (3) | 2023.11.21 |
---|---|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31) (0) | 2023.11.15 |
십자가의 도(고전1:18-25) (2) | 2023.11.01 |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고전1:13-17) (1) | 2023.10.11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고전1:11-12) (1) | 2023.10.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