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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십자가의 도(고전1:18-25)

by 똑똑이채널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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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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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동유럽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난 후에 느낀 게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국개신교와 독일개신교의 영성이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례로 종교개혁500주년 기념행사 때 한국개신교는 목회자들이 나서서 회초리 5대를 때리는 퍼포먼스를 벌였다고 하죠.

그때 독일개신교 목회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독일개신교 목회자들은 나무 500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한국개신교 목회자들은 나의 죄를 반성하고 개혁하자는 취지로 회초리 5대를 때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일개신교 목회자들은 사회복음을 이루고자 500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이죠.

교회가 나서서 환경오염으로부터 나라와 사회를 구하자는 취지였던 것입니다.

 

(깨달음)그만큼 독일개신교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종교세 4%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사례비도 시의회에서 지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목회자의 삶도 투명하게 되고 삶의 자리를 떠난 목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만큼 독일개신교 목회자와 성도들은 모두가 함께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주의 영성이 아닌 사회영성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적용)그에 비해 한국개신교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영성은 어떻습니까?

오직 개인구원, 개인의 복, 가정과 자녀들이 복받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개인주의 영성이 강합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개인구원의 영성이 점차 확대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더욱이 종교세를 내는 성도도 없고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목회자도 없으니 정부의 간섭이나 제제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투명할 수 있는 구조가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고 오직 개인영성으로 처리할 뿐이죠.

 

우리교회도 누가 얼마의 십일조와 감사를 하면서 사는지 주보에 밝히지 않습니다.

오직 개인의 영성에 맡길 뿐이죠.

그러나 개인의 십일조와 감사를 국가에 보고하고 국가로부터 목회자가 사례비를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대혼란이 일어나겠지만 점차 투명한 교회가 회복될 수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개인구원의 영성이든지 사회구원의 영성이든지, 복음은 삶과 무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게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그 십자가는 논리나 철학이나 말장난으로 이룬 게 아니라 실제 삶으로 이루신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의 자녀로 사는 것도 우리의 삶속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좇는 그 삶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전자책]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BR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BR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BR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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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열을 일삼는 성도들을 향해 사랑의 질책을 쏟아낸 부분을 읽어봤죠.

그 단락의 마지막 부분인 17절이 이렇게 기록이 돼 있었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바울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세례를 폄하하기 위한 게 아니라 세례의 형식보다 본질을 더 중요시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뒤에는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만큼 나의 죄된 옛 삶을 청산하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세례의 본질이라는 것이죠.

그런 세례의 본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복음의 삶이요, 그를 위해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의 지혜라 함은 헬라 사람들이 말하는 수사학과 철학 곧 언변술을 말하는데, 바울은 그런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복음을 전하려 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공기의 진동이 끝나면 사라지듯이 삶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걸고 복음을 전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복음이 말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제물 되어 목숨을 내 놓음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죠.

그것은 잘 장난이 아니라 삶으로 자기 생을 던지신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사는 것도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삶입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이죠.

 

(전개)이제 오늘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단락은 십자가의 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18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원해)여기에서 ‘십자가의 도’가 나오는데 ‘도’는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17절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십자가의 도’ 곧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던 그 놀라운 대속의 사건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멸망하는 자와 구원얻는 자는 서로 대비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보고 있겠습니까?

지금도 그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오늘도 구원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고리타분한 것처럼 말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소유나 자기 재능과 능력을 더 믿고 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요?

그들에게는 여전히 십자가에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이 없이는 구원의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받은 자녀만 가능한 것이죠.

 

지금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두 갈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되는 길을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굉장히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걷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원해2)그런데 여기에 ‘멸망하는 자’라는 헬라어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타동사입니다.

우리말로는 자동사 같지만 정확히 번역하면 ‘파괴시키는 자’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가 누구를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이지요.

 

내가 예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함 없이 호흡이 끊어진다면 나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파괴시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형으로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자라는 것이죠.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땅에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는 게 하나님의 심판이자 멸망입니다.

 

(깨달음)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피해를 입었는데 부실공사를 했던 사람들은 뒤늦게 구속돼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진 법의 심판은 언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까?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가 아니라 그들이 부실공사를 하고 부당 이득을 취할 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죠.

부실한 다리가 눈에 안 보일지라도 0.001%씩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릴 때마다 그 심판이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온 것이죠.

 

(적용)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이 세상에서 행한 잘못의 결과를 보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다 볼수 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한 눈에 다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만큼 내가 복음의 진리를 좇아 산다면 그 결과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 거죠.

내가 복음의 진리를 좇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살고 있다면 그것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내 삶을 파괴시키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나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고 있다면 현재진행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성취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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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이재철 목사님이 호산나교회에 말씀을 전한 내용 중에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복음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종교인은 자신이 신봉하는 경전을 소중하게 떠받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한 달간의 라마단 금식기간 동안 해가 떠서 해가 질때까지 아무 것이나 먹거나 마시거자 피울 수가 없죠.

그들의 특별절기인 하지가 되면 불과 열흘 동안 전세계에서 200만명의 사람들이 메가로 몰려듭니다.

그런 특별절기를 제외하고도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매일 하루에 정해진 5번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원을 찾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이 머문 곳에서 메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도 이슬람교도를 향한 기도의 방이 따로 마련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정으로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대로 사고 있는지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모두가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후세인 동상을 쓰러트렸습니다.

그 직후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대약탈을 벌였습니다.

박물관 상점 약국 등 모든 것이 쑥대밭으로 변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사원을 찾아가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이라크의 99%는 이슬람교도들입니다.

그 약탈을 벌인 99%사람들도 이슬람교도들입니다.

우리는 코란 내용을 다 알지 못하지만 어릴 때 그런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은 손 목을 잘라야 한다는 율법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 코란의 율법은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한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이슬람교의 경전은 이슬람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왜곡되는 게 아닙니다.

이슬람 경전을 알고 있는 사람, 그 경전으로 머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전인 성경을 정직하게 받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 앞에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런 이슬람교도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좇아 산다고 한다면 그 복음의 말씀 앞에 나를 쳐 복종시키는 삶이 수반되지 않으면 약탈하는 무슬림교도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본문의 바울이 구원의 생명이요 능력이 되는 주님의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삶으로 살아내는 복음이 없으면 그것은 성경을 유린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지 않으면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이요 개인주의영성으로 그칠 뿐 사회영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삶으로 살아낼 때에만 현재진행형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삶으로 살아내는 복음의 능력안에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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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의 생명이요 능력인 복음은 입술로 떠벌리거나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아니더냐?”

헬라인들은 철학과 수사학과 웅변술의 감언이설로 사람을 끌어내려 하지만 복음의 삶이 없이 어찌 생명과 능력이 나타나겠느냐?”

독일개신교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500그루 나무를 심은 것은 그만큼 사회와 나라가 바르게 나가야 할 삶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니더냐?”

바울이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로고스를 구원얻는 능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어찌 삶과 무관한 일이겠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입술로 논리로 성취한 일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몸을 제물로 삼은 그 삶과 관련된 일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비록 사람을 감화시키는 말 주변이 없다 할지라도 너의 삶에 신실한 복음이 묻어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능력으로 삼지 않겠느냐?”

너의 개인구원의 영성을 뛰어넘어 이 사회와 나라가 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할 때 그것을 기쁨으로 받지 않겠느냐?”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로고스는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가자 삶의 능력이니 말이다.”

오늘을 사는 네가 주님의 자녀로 사는 것인 공기의 진동인 입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코란이 짓밟히고 있지만 너의 삶으로 인해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로고스가 더욱 존귀케 되었으면 좋겠구나.”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입술의 구호나 기도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삶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한국개신교에 비해 독일개신교가 앞으로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로고스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복음의 능력 때문에 그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삶을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동안 현재진행형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말씀을 유린하는 자가 아니라 성경말씀을 더욱더 받들어 순종하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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