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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고전1:11-12)

by 똑똑이채널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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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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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한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12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거점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한 모습이 담겨 있죠.

13-21장까지는 정복한 땅을 각 지파별로 할당해서 분할해줍니다.

12지파는 물론이고 6개의 도피성과 레위인들을 위한 48개 목초지 성읍도 차례로 분할해 주죠.

 

이제 22장에 가면 가나안 정복 전쟁 이전에 가나안 동편 땅을 할당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돌아가라고 하죠.

물론 이제껏 함께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한 그 전리품도 함께 나눠서 가져가도록 하죠.

그런데 그 세개 지파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동편에 돌아갔을 때 취한 행동이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죠.

 

과연 그 일이 무슨 일이었을까요?

그 세 지파가 함께 한 일은 요단가 근처 언덕에 큰 번제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보통 하나님 앞에 번제단을 쌓은 일은 성경에서 좋게 평가를 하죠.

 

그런데 요단 서편의 9개 지파에게는 가나안 동편의 세 지파가 쌓은 번제단이 우상을 위한 번제단처럼 보인 것이었죠.

그 때문에 9개 지파 연합은 당장에라도 쳐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여러 논의 끝에 천부장들을 보내 진상을 파악하자고 하죠.

그때 9개 지파의 천부장들이 요단 동편의 세 지파에게 찾아갔는데 뭔가 자초지종을 알아보기보다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쏟아부었죠.

 

그러자 그들 세 지파 정확히 말해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차분하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위해 제단을 쌓은 게 결코 아니라고 말이죠.

훗날 자기 후손들이 요단강 서쪽에 살고있는 지파와 거리감이 생겨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후대를 생각해 요단 서쪽이나 동쪽이나 모두가 한 하나님을 섬긴 후손이었다는 걸 각인시키고자 그 제단을 쌓았다는 것이죠.

 

그때 비로소 진상조사단도 그들의 말을 좋게 여겼고 모든 오해가 풀리게 된 것이죠.

 

(깨달음)어떻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에도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갈등이 일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뭔가 선한 의도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한 일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 말입니다.

그때 자기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화평의 관계를 깨트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초지종을 차분하게 파악해서 오해를 풀고 서로의 화평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죠.

 

(적용)뭐든 자기 판단으로 상대방을 속단하게 되면 분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만 옳다고 내세운 채 상대방을 품지 못하면 더 큰 분쟁과 다툼과 감정까지 상하는 이들이 일어나죠.

그 모든 일들을 미연해 예방할 수 있는 길은 그만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듯 상대방을 마음에 품는 그릇으로 사는 길 뿐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교회가 화평가운데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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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코자 에베소에서 머물 때 편지를 썼죠.

그 편지를 네 개나 썼지만 지금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것이 고린도전서와 후서죠.

고린도전서를 써 가면서 맨 처음 문안인사 말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이상적인 인사말이 무엇이었습니까?

2천년전 인구 60만 명 가운데 겨우 10명 안팎의 작은 무리들이 모인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교회라고 칭한 점이었죠.

지금도 그 모임의 수가 백이든 만인든 천이든 열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문안 인사를 통해 오히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뭔가 바로잡으려면 책망하고 훈계해야 하지만 오히려 바울이 감사하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 중의 괴수인 바울 자신을 품으시고 진리로 세워주신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세워주실 걸 믿기에 감사하다는 것이었죠.

주님께서는 이 땅에 죄인과 교제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니 그런 주님과 교제한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충분히 진리로 세워질 것을 믿기에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이 본론에 접어들면서 한 첫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편지를 쓴 목적을 밝히는 것처럼 ‘온전히 합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이 그것인데 ‘합하라’는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북한의 김정은처럼 히틀러의 독제체제처럼 전체주의처럼 획일화를 보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서로의 개성과 신앙을 존중해주면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와 제물이 되신 그 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이 되라는 것이었죠.

‘합하라’는 헬라어 ‘카타르티죠’(καταρτίζω)가 지닌 본래 의미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카타르티조’라는 단어는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다’는 뜻도 있다고 했죠.

그만큼 주님을 향한 마음과 자세로 ‘합하라’는 것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누군가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해주는 자세를 보이라는 것이었죠.

그만큼 고린도교회의 문제 앞에 나의 주관적인 우물에서 탈피해 상대방의 마음을 담는 더 넓은 그릇이 돼야 한다는 뜻이죠.

 

(깨달음)신앙이 성숙해는 척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탈피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키우는 것이죠.

나라는 우물에서 탈피해서 어떻게든 한 사람 한 사람 더 많은 사람을 품는 그릇이 되는 것이죠.

바울은 그런 마음과 자세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그릇으로 ‘합하라’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분쟁에 대한 원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말씀인데 본문 11-1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원해)지금 에베소에 있는 바울이 ‘글로에의 집편’에 있는 사람에게 분쟁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죠.

글로에라는 사람의 혈육인지 그 집의 종인지 정확히 알길은 없지만 글로에와 관련된 사람한테 고린도교회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좋은 소문은 쉽게 퍼지지 않지만 나쁜 소문은 금방 퍼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에 있는데 그 교회의 나쁜 소식이 에게해를 건너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회중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죠.

그 모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창문이 돼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는 창문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올바르면 개개인이 감동을 받는데 교회가 어긋난 모습을 보이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 한 사람이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여기에 ‘분쟁이 있다’는 헬라어 단어가 10절에 나오는 ‘분쟁이 없이’할 때의 ‘스키스마’(σχίσμα)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11절의 ‘분쟁’이란 단어는 ‘에리스’(ἔρις)인데 서로 투쟁하고 다투는 형국(contention strife wrangling)을 가리키는 단어죠.

서로가 옳다고 말다툼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줘서 찢길 대로 찢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찢긴 것입니까?

12절에 보면 파벌 싸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아볼로는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으로 학문과 자식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죠.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뒤에 아볼로가 들어가서 고린도교회를 목회했는데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게바’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인데 헬라에 속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베드로라고 해야 한데 굳이 게바에게 속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의식을 내세우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굳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인데 따로 말하는 것은 파당을 짓는 무리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짧은 구절에 우리말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라는 말이 네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파당을 짓는 이들 모두가 자신의 사적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죠.

 

(원성)그런데 이 말씀과 대비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빌립보서 1장 10-18절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 처하면서 쓴 편지가 빌립보서인데 무엇을 말한 내용입니까?

자신이 평생을 복음을 전하면서 돌아다녀보니까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전한 이들도 있고 선한 뜻으로 전한 이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착한 뜻으로 전한 이들은 바울과 함께 주님의 복음에 협력자들인데, 다른 이들은 바울의 명성이 커질때마다 시기와 질투심으로 가득차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그런 마음으로 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무슨 방도로 전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그것을 함께 기뻐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내에 아볼로를 따르는 무리들 곧 가르치는 교사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따르는 무리들 곧 신유의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그것만을 맹신하듯 따르는 무리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죠.

게바처럼 유대인의 의식만을 고집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무리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파를 내세우는 무리들도 따로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 아닙니까?

하지만 다른 무리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그런 파벌을 만든다면 그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파벌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이 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떤 주장을 내세우고 어떤 모임을 만들든 간에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세우는데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마음과 자세 없이 오직 나, 나, 나, 나, 나의 주장 나의 은사 나의 가르침 나의 의식만 옳다고 여긴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교회는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상처투성이만 남게 되는 것이죠.

그만큼 나 중심의 사고방식 나 중심의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타인을 품어야만 온전한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분쟁을 넘어 주님의 화평 속에서 하나님의교회를 세워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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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의 가치관과 신앙을 존중해주면서 분쟁하기보다 화평을 좇아 하나님의교회를 세우길 원하시는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네가 속한 모임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자인지 화평을 추구하는 자인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고린도교회 내에도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와 같은 파벌을 형성하는 이들이 있어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더냐?”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들만이 옳고 최고라고 여기면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짓밟으려 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더냐?”

모두가 나, , , , 나라는 우물안 개구리 상태를 주장하지만 우리 주님은 상대방을 품는 그릇이 되기를 원치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서로가 옳다고 말다툼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줘서 감정까지 찢기지 않도록 늘 선한 상태를 이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만큼 너의 자아나 너의 의로움이나 나의 은사보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더욱 귀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

설령 누군가 자신의 성경지식을 내세울지라도 그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여길지라도 겸손하게 받아주는 모습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교회는 죄인인 인간이 모이는 곳이기에 그만큼 상대방을 품어야만 주님의교회로 세워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서 누가 어떤 주장을 하든 전도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이 세워진다면 성령님께서 그것보다 더 기뻐하실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만큼 너의 삶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주님께서 받으시는 삶,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삶,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주님께서 받으시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나를 받으옵소서 나를 받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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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화평의 나라입니다.

서로 분쟁하고 다투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습니다.

고린도교회에 그런 분쟁과 다툼과 감정을 상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바울이 권면하는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주장만 옳다고 강화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을 주님을 품듯 마음에 품는 그릇이 돼야 한다고 말이죠.

우리 주님께서는 상대방이 어떤 모양 어떤 모습을 하든 그 중심에 하나님의 복음을 세워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누군가 성경교사를 따르고 누군가 은사를 따르고 누군가 유대인의 의식을 좇는다 해도 함께 발맞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든지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의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의와 화평 속에서 주님의 나라 주님의교회를 세워가시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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