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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미국의 켄사스주 상원의원 프랭크 칼슨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은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다섯 가지 성품을 지닌 사람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결함을 메울 줄 아는 사람, 둘째 이익만을 좇지 않는 사람, 셋째 정직한 사람, 넷째 진실한 마음의 사람, 다섯째 시종일관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결함과 약점을 지적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누군가의 약점을 보완해주고 덮어주고 메워주는 사람은 하나님의나라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죠.
또 있죠.
이 세상 사람치고 이익을 좇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익만을 좇다가는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때 언젠가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아도 함께 하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며 사는 것, 그런 사람이 하나님나라와 교회에 필요하죠.
세 번째 정직한 사람,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정직해야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살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진실한 사람도 마찬가지죠.
마지막 다섯번째 시종일관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소망교회를 섬겼던 곽선희 목사님이 오래전에 한 간증입니다.
그 교회에 이한빈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다고 하죠.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인데, 그분의 특징은 교회 나와 앉을 때 성가대석의 사각지대에 앉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찬양을 해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성도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사하러 나갈 때면 누구보다 인사를 잘 하더라는 것이죠.
곽선희 목사님이 그 장로님에게 물어봤다고 하죠.
“장로님은 왜 언제나 그 자리에 앉습니까?”
“그거요? 다른 사람들이 앉기 싫어하는 곳이니까요.”
(깨달음)어떻습니까?
그런 분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나라와 하나님의교회에 기쁨과 화평이 넘쳐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가릴지라도 말 없이 섬기고, 인사하고 섬기는데는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사람이 있는 것 말이죠.
누군가 결함과 미숙함이 보여도 지적질하지 않고 자신이 은밀하게 메워주면서도 오른 손이 한 일 왼 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그런 공동체는 평안하여 든든히 설 수 있는 것이죠.
(적용)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시고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누군가의 결함을 메워주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시종일관 변치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해결코자 쓴 편지를 통해 서론에서 ‘감사하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다섯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이 9절 말씀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미쁘심’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했죠.
‘미쁘시도다’는 헬라어 ‘피스티스’는 ‘신실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한결같으신 하나님,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죠.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해주시기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과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했죠.
바울이 그렇게 고백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셔서 바르게 세워주신 것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세워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교제’라는 말도 헬라어 ‘코이노노스’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동역자’ ‘반려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가 옳고 잘났다고 다투지만 실은 부부처럼 함께 살아가는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신실하신 주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교제하고 계시니 분명코 그들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을 믿기에 감사하다는 것이죠.
(깨달음)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이 다른 친구와 사귈 때 훨씬 좋은 친구와 사귀길 바랍니다.
자기 자식보다 공부도 더 잘하고 더 배울 게 많은 친구와 사귀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인인 나를 불러주셔서 주님과 교제해 주시고 동역자로 삼아주고 계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상대방의 단점과 허물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사람과 교제하며 사는 걸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말씀인데 본문 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원해)우리 개역개정성경에는 맨 앞에 빠져 있는 게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데’(δέ) 곧 ‘이제’라는 부사가 그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인사말이었고 이제는 본론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는 ‘내가 권한다’는 말이 맨 먼저 나와 있습니다.
‘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인데 ‘간청한다’(desire) ‘기도한다’(pray)는 뜻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잘못한 것을 질책하기 위해서 쓴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사와 감사를 격조 있게 했다면 본론에 들어가서는 따끔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본론에 들어간다고 하면서도 ‘간청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간청합니까?
바울 자신의 인격이나 겸손함으로 하는 게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인격으로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무엇입니까?
나와 같은 형편없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교제하시는 인격이죠.
자기 자식이 형편없는 친구와 놀게 할 부모도 없고 그와 동업하게 할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인격으로 죄인인 우리를 친구삼아 교제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런 인격으로 권한다, 하고 바울이 말하고 있 것입니다.
(원해2)그렇다면 바울이 간청하고 호소하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여기에서 ‘분쟁’이란 헬라어 단어가 ‘스키스마’(σχίσμα)인데 ‘분열’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분쟁과 분열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분쟁은 말로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열은 완전히 갈라선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바울은 너희들이 다투고 싸울 수도 있지만 완전히 분열하지 말고, 완전히 갈라서지 말고, 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인데 서로 갈라서지 않는 상태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할 때 가능한 일이죠.
그렇지 않는 일들은 히틀러의 독재나 북한 김정은 일인지배체제와 같은 격이죠.
바울은 그런 획일적인 모습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합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죠.
(깨달음)그런데 ‘합하라’는 헬라어 단어 ‘카타르티죠’(καταρτίζω)는 여러 부품을 잘 관리해서 ‘제대로 작동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자동차도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과 하체에 들어가는 부품이 다르지 않습니까?
모양도 다르고 기능과 역할과 그 가격도 다르죠.
자동차는 모든 부품이 모양도 다르고 가치도 가격도 다르지만 주인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서로 연합해 있습니다.
바울이 권면하는 게 그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전체주의처럼 획일적인 모습으로 합하라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가치와 배경과 모양도 다르기에 존중하면서도 이 땅에 하나님나라 하나님교회를 이루는 같은 목적으로 합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카타르티죠’라는 단어가 ‘수선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부르실 때 그들이 그물 깊는 것을 보고 부르셨습니다.
거기에 ‘그물을 깊다’는 단어가 ‘카타르티죠’인데 ‘수선하다’(mending)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가 부족한 부분 그물의 터진 부분은 잘 살펴 꿰매주는 마음으로 합하라는 것입니다.
(적용)하나의 공동체가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약한 부분을 보완할 때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의나 자기 주장을 강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오히려 전체를 보면서 누군가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해 줘야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물을 펼쳐 놓고 어느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지, 그걸 살피고 보완해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음을 합하라, 마음을 수선하라, 하고 요구하는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의 주관적인 우물에서 탈피해 상대방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교회를 이룰 때 갈라섬 없이 서로 연약함을 수선해주는 은혜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문제점을 바로잡고자 편지를 쓴 것인데 책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감사한다고 고백하지 않더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서로의 주장으로 분쟁할 수 있지만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수선해주라고 권면하지 않더냐?”
“그것은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주장만 옳다고 내세울 때는 불가능한 일이요 서로의 개성과 가치를 존중해 줄 때에만 가능한 것 아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네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너를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너의 주장보다 상대편의 형편을 살피는 게 중요하지 않겠느냐?”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죄인인 인간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내세울 때는 하나님의교회를 세우기가 힘들지 않겠느냐?”
“비록 너의 주장이 옳을 지라도 상대편의 마음과 뜻을 생각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수선해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서로의 아픔도 이해하고 서로의 주장도 받아줄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은 그만큼 너 자신이 주안에서 십자가에 매일 죽어야만 가능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바울뿐만 아니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것은 형편없는 우리 자신과 교제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와 같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면서 때론 나의 자아나 나의 의로움이나 나의 주장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만 고집한다면 연합과 화평의 관계는 깨지고 불협화음만 낼 것이요 분쟁을 통해 분열을 낳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모습을 상기시켜주면서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합하라고, 서로의 연약함을 수선해주라고, 권면합니다.
그물이 헝클어졌거나 찢어졌을 경우 그것을 수리하는 마음과 자세로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메워주는 은혜의 도구가 되도록 말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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