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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어느 날 율법사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까?
“예수님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하고 말이죠.
그 율법사들은 예수님께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빠트리기 위해 찾아와서 물은 것입니다.
그 율법사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것을 율법서라 하는데, 그 계명을 613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을 248개,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365개로 나누죠.
그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제일 큰 계명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무슨 계명이 제일 큽니까, 하고 물었을 때, 왜 물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A라고 대답을 하면 그들은 B를 들이대며 그것이 크지 않냐고 따져묻고자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제일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해서 대답한 것입니다.
지금 율법사들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구약의 율법으로 말이죠.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곧바로 이어서 말씀해 주셨죠.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에서 둘째란 첫째 부분에 비해 비중이 덜하다는 게 아닙니다.
첫째와 똑같은 비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바로 이 두 계명이 율법서와 예언서로 이루어진 구약성경의 강령이요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약성경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 말이죠.
예수님의 그 대답 앞에 율법사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그 말씀이 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죠.
(깨달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살인해도 무방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의 아내나 남편과 간음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존중하며 사는 길이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할 수는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이 지닌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학대하며 살 수 있는 게 아니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하는 거죠.
그것이 십계명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계명이요 명령입니다.
바로 그것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 예수님 오신 이후에 완성된 신약성경의 핵심도 그것이죠.
(적용)그래서 예수님께서 ‘주님의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실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불렀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긴 하지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때 공동체 의식을 갖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 자식이 넷이나 다섯 있을 때 늘 형제의 삶을 돌아보고 살펴볼 수 있죠.
만약 ‘내 아버지’라고 하면 아버지를 사유화려고 하고 자기 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신앙인으로 변질될 수 있죠.
하지만 ‘우리 아버지’하면 다른 형제들의 형편을 헤아리듯 서로 사랑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주일날 예배 때도 공동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이유도 그것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대표 기도할 때 ‘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공동기도란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한 데 모아서 기도하는 것이죠.
그때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죠.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서로 헤아리는 마음으로 서로의 형편을 살피며 함께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니 말이죠.
그만큼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 속에는 ‘내 삶을 타인을 위한 통로로 살겠다는 결단이 들어가’ 있는 표현입니다.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유화하는 기도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내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의 도구가 되겠다는 의식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죠.
그것은 예배를 드릴때만 아니라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수련회를 할 때도, 등산을 갈 때도 마찬가지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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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2천년전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갔을 때 고린도는 인구 60만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읍 외곽 둘레가 10km였고 동쪽과 서쪽에 무역항이 각각 놓여 있었죠.
그러니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무역상들이 들어왔습니다.
일제 강점기 평양 원산과 군산에 이어 목포가 세 번째로 물물교역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말이죠.
그로 인해 고린도 사람들은 부와 사치와 향략에 빠져 살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고린도는 해발 고도에 아크로폴리스 성채가 자라하고 있었고 그곳에 비너스 신전을 비롯해 여러 신전이 있었죠.
그 신전에서 섬기는 여사제가 1천명에 달했는데 낮에는 제사에 참여하고 밤이 되면 고린도시내에 내려와 매음을 하더 창녀였죠.
더욱이 그 신전에 드리는 제사 음식을 고린도 시내에 가져와 사고 팔았죠.
그만큼 고린도는 영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도시였고 수많은 신을 모시는 영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죠.
바로 그런 고린도에서 바울이 낮에는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텐트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비난했죠.
그때 바울은 유대인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비록 10명 안팎의 사람이었어도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는 모임이자 교회였죠.
그래서 바울은 세상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을 향해 제사하는 이교도의 신전에 눈길과 마음이 쏠리지만 하나님은 다르다고 했죠.
그 모임의 수가 천을 이루든 만을 이루든 백을 이루든 10명을 이루든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들의 모임에 주님의 눈길과 마음이 쏠린다고 했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문안인사를 나눈 것이었죠.
(깨달음)오늘날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유럽에 있든 러시아에 있든 북한과 중국의 지하교회든 그것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환경이 좋든 불편하든, 그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든 없든,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 모임에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과 눈길을 쏟아붓는 분이라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문안인사를 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칭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죠.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원해)헬라어 원문은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가 맨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로부터 나온다고 밝히고 있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칭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써서 보내고 있고 음행의 문제 제사의 문제 파벌 문제 은사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바로잡고자 써 보낸 것이죠.
어찌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고린도교회를 세웠지만 설립자이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고린도교회를 떠나서 에베소에 머물고 있기에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 ‘너희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죠.
하지만 바울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에베소에 있는 자기 자신이나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나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죠.
큰 딸이 미국에 있고 작은 딸이 독일에 있고 셋째가 한국에 있어도 서로가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하고 부르는 것과 같죠.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대우주적인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마음과 자세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에베소에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곧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교회에도 온 마음과 눈길을 쏟아붓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너희들에게 지금 음행의 문제 제사의 문제 파벌의 문제 은사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모든 관점을 너희 개개인에게 둘 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라는 관점을 갖고 다시 생각해 보라는 뜻이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되 잘 나가는 자식보다 몸이 않조거나 어렵게 사는 자식에게 더 마음을 두듯이 말이죠.
같은 하늘 아래 한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긴다면 진정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주님의 통로 주님의 도구로 섬겨야 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교회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이죠.
건물도 크고 사람 수도 많이 모이는데 편가르기를 하고 연약한 사람을 제쳐놓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할 수가 없는 것이죠.
비록 사람이 많지 않고 예배당도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섬기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섬길 때 진정으로 은혜와 평강이 깃드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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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그렇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 후에 바울이 이제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4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원해)이 구절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감사한다’는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가 맨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다는 것이죠.
왜죠?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들어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또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세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회당장 소스데네까지 고발하여 끌고갈 정도였는데, 그런 고린도지역에서 하나님의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죠.
바로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런데 ‘감사하다’고 표현을 하기보다 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혼내주려고 쓴 편지 아닙니까?
음행의 문제 제사음식의 문제 파벌의 문제 은사문제를 일으킨 그 부분들을 조목조목 바로 잡고 혼내주는 문구를 써서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맨 먼저 ‘감사하다’고 써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비록 잘못 하고 있고 문제를 일으키지만 잘 몰라서 그럴 수 있고 세상의 혼탁함에 빠져 그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부분들까지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기꺼이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자식이 잘 못했을 때 야단만 치면 그 자식이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형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형이 중학교 화학 시간엔가 볼펜으로 딱딱 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지 말아라’하고 주의를 주지 않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막구가내로 뺨을 때리더라는 것이죠.
지금 같으면 그 선생님에게 징계에다 직위해체까지 처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는 아무런 제제도 없던 시절이었죠.
그것은 자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한 아버지 밑에 자라는 자식이 다 말을 잘 듣고 부모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죠.
어떤 자식은 아빠를 좋아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자식은 엄마를 좋아할 수도 있죠.
더욱이 뭔가를 할 때 부모님과 상의를 하는 자식도 있고 제 멋대로 선택해서 일을 크게 벌리는 자식도 있죠.
그럴 때 부모 마음에 뭔가 들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오히려 그런 자식일수록 더 다독이고 더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격려해줘야 하는 법이죠.
바울이 지금 그런 아버지의 심정으로 ‘감사한다’고 써 보내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원인을 밝히고 꼬집고 비난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너희들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안에 머물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속을 썩여도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자식이라면 좋은 것이죠.
말썽을 일으켜도 집 안에서 그 부분을 해결코자 한다면 좋은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섬기는 고린도교회 곧 하나님의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 섬기며 ‘감사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2천년전 인구 60만명이 사는 고린도에 유스도의 집에서 모인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교회라고 부를 때 어떤 마음이 들더냐?”
“10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이지만 저마다 살아온 과정도 삶의 수준도 지향하는 바도 다 다르지 않았겠느냐?”
“그런 그들이 음행의 문제 제사음식의 문제 파벌의 문제 은사자랑의 문제로 시끄럽게 했는데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비록 그들이 다른 성향을 보이고 문제를 일으켜 시끄러워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섬기고 있지 않냐고 써 보냈지 않더냐?”
“교회 안에서는 다 생각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고 지향점도 달라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하나님’의 관점으로 서로를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사랑하는 딸아.”
“너에게 자식이 있고 그 자식들이 다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맡긴 자식이지 않더냐?”
“그 자식이 미국에 살고 있고 유럽에 살고 있고 한국에 살고 있어도 실은 다 같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의 자식들이지 않더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질책하고 책망하고 싶어도 먼저 ‘감사하다’고 밝힌 이유도 그것이지 않더냐?”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흠이 있어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서로를 위해 섬기는 통로가 되길 바라는 심정이지 않았겠느냐”
“너도 자유로교회 곧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을 쏟아부으시는 하나님의교회에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생명의 통로가 되길 주님께서 바라지 않겠느냐?”
“그때 이 세상 누구보다도 하나님의교회를 소중히 여기며 그 기도에 친히 응답해주지 않겠느냐?”
(찬양)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 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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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부모 밑에 여러 자식이 있을지라도 다 성향이 똑같은 건 아니죠.
그 자식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 살더라도 실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죠.
하나님의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바라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와 같다는 점입니다.
비록 고린도교회가 말썽이 있고 문제와 다툼이 있어도 실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섬김의 통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자유로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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