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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은 자식들이 동성의 부모에게는 경쟁의식을 느끼고 이성의 부모에게 애정을 느끼는 거죠.
바로 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출처인 오이디푸스가 실은 고린도의 왕자였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로 태어나죠.
그 오이디푸스가 태어나기 전에 왕과 왕비에게 신탁이 떨어지죠.
“당신들이 아들을 낳으면 아들은 아버지인 줄 모르고 죽일 것이고 어머니인줄도 모르고 아내로 삼을 것이다.”
그런데 왕과 왕비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신탁이 두려워서 갖 태어난 아들의 발을 묶어 산속에 버리죠.
‘오이디푸스’란 ‘부은 발’이란 뜻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를 산에 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웃 도시인 고린도의 목동에게 넘기죠.
목동은 그 아이를 고린도의 왕에게 바쳤고 그때부터 오이디푸스는 고린도의 왕 폴리보스를 친아버지로 알고 자라죠.
어느 날 오디이푸스가 다투는데 상대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왕의 아들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 온 주제에, 왜 거들목거리는 거야”
오이디푸스는 그 말이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자기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 없었고 델포이 신전에 올라가 사제에게 물어보죠.
그때 그 사제가 신탁을 말해 줍니다.
“너는 네 아버지를 아버지인지 모르고 죽일 것이고 어머니를 어머니인 줄 모르고 아내로 삼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고린도의 왕과 왕후를 떠나고자 다른 쪽 길로 갑니다.
그 무렵에 스핑크스가 나타나 고린도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하면 잡아 먹는 일이 벌어졌죠.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생물이 무엇이냐?”하면서 말이죠.
그때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스핑크스를 직접 처단코자 마차를 타고 가는데 좁은 길목에서 오이디푸스와 마주한 것이죠.
서로 길을 양보하라며 다퉜고 라이오스의 시종이 오이디푸스의 말을 죽이자 오이푸스는 상대편 모두를 전멸시켜 버리죠.
그 마차 속에 타고 있던 자기 아버지요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까지도 말이죠.
그리고는 스핑스크의 수수께끼까지 ‘사람’이라고 마추면서 스핑크스를 퇴치했고 테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오르죠.
그 후 왕의 아내였던 이오카스테 곧 자신의 어머니가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죠.
그때부터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선정으로 잘 다스렸는데 갑자기 역병이 돌게 되었죠.
그 원인에 대해 신탁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선왕인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 복수하면 역병이 사라질 것이다”
결국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걸 알게 되었고 또 어머니도 아들과 결혼한 걸 알게 되죠.
그 사실이 밝혀지자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진실을 견디지 못하고 궁궐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죠.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그 괴로움을 못 이긴 채 어머니의 브로치를 빼서 자기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말죠.
그와 같은 오이디푸스에 관해 17세기의 극작가 볼테르가 쓴 희곡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 희곡 속의 마지막 장면에 오이디푸스가 눈을 뽑고 신하와 주고받는 대사는 명대사로 여기죠.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찔렀으니 실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후에 정신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말이 있습니다.
“오 빛이여.”
그러자 그의 신하들이 묻습니다.
“왕이시여 당신은 지금 눈이 없는데 어떻게 빛을 보신단 말입니까?”
그때 오이디푸스는 정말로 멋진 말을 남깁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이 세상의 출세와 성공이라는 욕망을 가진 눈으로는 참된 진리의 빛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다는 뜻이죠.
오이디푸스가 육신의 눈이 멀고서야 비로소 진리의 눈을 떴다는 뜻이죠.
우리도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좇아 사는 육신을 벗어날 때 진리에 대해 눈 뜬 자로 살 수 있는 것이죠.
왜 그와 같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먼저 드리는 것입니까?
고린도하면 이 세상과 다른 세상처럼 너무 멀게 느낄 수 있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를 하면 우리와 친밀한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함께 건축물 양식인 고린도 양식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배운 친숙한 내용이죠.
(역배)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공동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1차선교여행을 떠나는데 그때 수행원이었던 마가가 중간에 돌아가죠.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고자 하는데 1차때 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죠.
바나바는 사촌 마가를 데리고 1차 여행지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 아시아로 가려고 했죠.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곳 아시아 곧 지금의 터기 서남부 지역의 길을 막으셨고 도리어 마게도냐 사람들이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죠.
그때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네압볼리아를 거쳐 빌립보로 가서 루디아라는 여자에게 세례를 주죠.
그 후에 베뢰아로 갔다가 아테네로 갔고 그 뒤에 고린도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죠.
그 당시 고린도는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 도시 국가 중에 가장 강성했죠.
고린도의 오른쪽에는 겐그레 항구가 있고 왼쪽에는 네케이온이라는 항구가 있었죠.
그만큼 동서교역의 물량을 가장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던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3세기에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 곧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에게 정복당하고 주인이 바뀌죠.
그 후에 주전 146년에 로마제국이 고린도를 장악하고 주전 144년에 로마 황제 카이사르가 재건하죠.
바울이 고린도를 찾아갔을 때는 로마 제국에서 네번째 큰 도시요 아가야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인구는 목포시 인구보다 3배나 많은 60만 명에 달했죠.
거기에 해발 575m에 달하는 아크로폴리스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 곧 비너스 신전이 있었죠.
그 신전에서 일하는 여자 사제의 숫자가 천명이었는데 낮에는 제사를 드리고 밤에는 시내에서 매음을 했죠.
문제는 신전의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고린도 시내 시장에다 팔았다는 점입니다.
(깨달음)바로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를 찾아갔을 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를 찾아갔을 때 고린도는 잡신과 우상과 타락과 음행과 사치가 만연된 도시였죠.
그런 도시 속으로 바울이 들어갈 때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바울은 대머리였고 안짱다리였고 옷은 남루하기 그지 없었겠죠.
누구 하나 눈여겨보거나 관심조차 없는 모습이었죠.
(역배2)그런데 사도행전 18장 1-4절을 보면 바로 그 고린도에 바울이 들어가서 만난 사람이 있죠.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죠.
그 부부는 바울처럼 텐트를 만들던 사람이었죠.
바로 그 부부와 함께 바울은 평일에는 텐트를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고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아니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8장 5-6절을 보면 오히려 그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고 훼방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곳에서 옷을 떨면서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했겠습니까?
그 화려한 고린도 도시, 부와 사치와 퇴폐와 향락이 판치는 그 도시에서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자 한 거죠.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그 대도시에서 바울도 형편없었고 바울이 전한 예수님도 형편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그래서 바울이 선택한 것은 사도행전 18장 7-8절에 나오듯이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던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한 겁니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은 인구 60만 명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 한 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집을 예배처소로 사용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생명의 장을 열어나갔던 것입니다.
거대한 고린도의 물질과 사치와 향락과 우상을 좇아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진리를 좇고자 말이죠.
그런데 유스도의 집을 예배당 삼아 소수의 무리들이 교회를 이루며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이 없었겠습니까?
있었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바울은 그렇게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도 무려 1년 6개월(행18:11)간 복음을 전했죠.
그러다가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해 재판 자리에 앉히고 심문하죠.
갈리오 총독은 바울이 로마법을 어긴 게 아니라 유대인의 율법임을 알고 재판장이 되지 않죠.
그러자 그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서 때리는 일이 발생했죠.
그때 비로소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과 작별하고 에베소를 거쳐 예루살렘과 안디옥교회로 돌아오죠.
그런데 바울이 떠난 뒤에 실망케 하는 소문이 들려오는 것이죠.
물질과 쾌락과 우상과 탐욕이 들끓는 황제의 도시라 세속화되었다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 음행의 문제가 발생했고, 제사문제 때문에 시끄럽고 또 은사 문제로 복잡하다는 것이죠.
바울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합니까?
3차여행 때 에베소에 2년간 머무는 동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죠,
한 편으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꾸짖고 한편으로는 주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격려한 것이죠.
그만큼 영적으로 타락한 도시에서 밝은 심령으로 깨어 있기를 바란 것이죠.
오이디푸스처럼 이 세상의 눈만 갖고서는 진리와 생명의 눈을 뜨지 못하지만 오직 주님께 매여 있을 때에만 진리와 생명에 눈을 뜰 수 있다고 말이죠.
(본문)바로 그와 같은 상황임을 알고 고린도전서 첫부분인 1-2절을 다시 읽어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원해)여기에 ‘하나님의 교회’ 할 때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입니다.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을 카리키는 말이죠.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의 유스도의 집에 모인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죠.
고린도는 성벽 둘레만 10km이고 그 도시에 60만명의 인구가 살고 거대한 성채와 신전이 즐비한 도시죠.
동서로 두 개의 항구가 놓여 있고 물물교역이 활발하고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오고 사치와 향락이 판을 치죠.
(깨달음)그런데도 바울은 그곳에 모인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교회’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모임보다도 훨씬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이 세상의 어떤 화려한 모임보다도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라는 것이죠.
(원성)그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 그 어떤 거대한 모임과 본질적으로 다른 모임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모임은 동창회나 정치적인 모임과 달리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모임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죠.
(주문)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모임보다도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이죠.
(주음성)주님께서 오늘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의 육신의 눈으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해 눈을 뜰 수 없지 않겠느냐?”
“예수 안에 죽어야 참된 생명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갔을 때 높은 성채에 거대한 신전이 즐비했고 천명의 여사제가 있었고 온통 향락과 사치가 만연하지 않았더냐?”
“인구 60만명이 사는 고린도에서 하나님의교회는 유스도의 집에서 두 세 사람이 모인데서부터 시작된 것 아니더냐?”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에 눈길과 마음을 쏟아붓지 않았떠냐?”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그러니 이 세상의 가치판단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가치판단을 귀하게 여기며 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크고 많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꿈꾸지만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의 가치를 좇는 교회여야 하지 않겠느냐?”
“고린도교회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유스도의 집에서부터 시작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존귀하게 여겨주셨듯이 말이다.”
“오늘을 사는 너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을 잊지 말고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오염되지 말고 주님 앞에 깨어 있는 하나님의교회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찬양)많은 사람들 참된 진리를 모른 채 주님 곁을 떠나가지만
내가 만난 주님은 참사랑이었고 진리였고 소망이었소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무거운 짐진 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 길만이 생명의 길 참 복된 길이라 항상 내게 들려주셨소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그대가 만일 참된 행복을 찾거든 예수님을 만나보세요
그 분으로 인하여 참 평안을 얻으면 나와 같이 고백할거요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예화)옛날 어떤 의사가 한밤중에 13㎞나 떨어진 먼 시골로 중환자를 왕진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의사는 가는 길목의 가장 가까운 첫번째 집에다 전화를 걸어 창문에 등불을 켜 둘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다 전화를 해서 역시 창문에 등불을 켜 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환자의 집에 이르는 동안 모든 길목의 집들이 창문에 등불을 켜게 되었습니다.
그 덕택에 의사는 쏟아지는 폭설과 어둠을 뚫고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이러한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서로 등불이 되어주는 모임이어야 하는 것이죠.
서로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함게 기도하고 함께 도와주는 영원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말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작은 등불과 같은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유스도의 집에 모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작은 등불처럼 고린도 사람들에게 영적인 빛을 비추는 등불이었어요.”
“주님 저도 누군가에게 생명의 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과 같은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찬양)많은 사람들 참된 진리를 모른 채 주님 곁을 떠나가지만
내가 만난 주님은 참사랑이었고 진리였고 소망이었소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년 전 고린도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로마도시들 가운데 네 번째로 컸던 도시였습니다.
아름다운 집이 있었고 높은 성채가 있었고 신전이 즐비했고 동서무역항로 때문에 부와 사치와 환락이 넘쳐난 도시였습니다.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직 그곳에서 생명과 진리의 복음을 전한 주님의 말씀만 남아 있습니다.
인구 60만명이 살던 고린도에서 유스도 집에 모인 사람들은 아주 작고 초라한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임을 ‘하나님의교회’라고 가장 존귀하게 여겨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크고 화려한 모임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좇는 자들의 모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임 곧 자유로교회도 그런 진리와 생명을 좇는 하나님의교회요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교회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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