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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항상 감사하노니(고전1:4-9)

by 똑똑이채널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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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하노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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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지난 주일날 ‘성결교회50대전국축구대회’를 앞두고 목포국제축구센터에서 축구경기를 했습니다.

평소 신발이 커서 애를 먹었는데 그날 어떤 목사님이 축구화를 하나 선물로 줬습니다.

발이 딱 맞고 새 신발이라 그런지 편하고 좋았습니다.

 

(깨달음)그 신발을 받고 느낀 게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제게 신발을 줬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내 신발을 나눠줘야 되겠다는 하는 생각이었죠.

물은 흘러야 생명이 있고 내가 아름답게 변하면 나와 함께 하는 그 누군가도 아름답게 변하기 마련이죠.

내가 움켜쥐고 고집을 부리고 생명을 경시하고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속에는 불협화음만 난무하겠죠.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를 수도 없는 법이죠.

 

(적용)그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때의 능력이란 선한 행실 곧 신실함, 아름답고 선하게 변화되는 삶, 그의 삶으로 주변 사람이 변화되는 그런 능력을 말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은혜안에 머무르는 생명의 삶이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일이지 않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3차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목회하면서 2차전도여행 때 세운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듣고 편지를 써 보냈죠.

총 네 개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중에 두 개만 남은 상태로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그것이죠.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해결코자 함이었습니다.

음행의 문제, 파벌의 문제, 제사음식의 문제, 그리고 은사 문제 등이었죠.

 

바울은 그 점들을 해결코자 편지를 써 보냈는데 맨 먼저 문안인사를 띄웠죠.

놀라운 것은 인구 60만명이 살고 있고 동서무역항이 있고 천명의 여사제가 섬기는 비너스 신전도 있는 그곳의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의교회’라고 칭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유대인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에서부터 시작됐는데 그 수가 10명 안팎의 모임이었죠.

그렇게 시작된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교회’라고 칭한 것은 사람의 많고 적음이나 건물의 화려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천을 이루든 만을 이루든 지하에 있든 밭에 있든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좇는 교회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밝혔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라는 의미죠.

비록 서로가 몸은 떨어져 있지만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같은 우리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그런 자식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라는 차원이죠.

 

 

야긴과 보아스

야긴과 보아스 작품소개: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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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말씀인데 본문 4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원해)우리 개역개정판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가 제일 뒤에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다릅니다.

‘유카리테오 토 테오’(Εὐχαριστῶ τῷ θεῷ μου) 곧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가 맨 먼저 나오죠.

그런데 ‘감사한다’는 헬라어 ‘유카리테오’는 ‘유’와 ‘카리스테’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유’(εὖ)라는 접두어는 영어로 ‘아주 알한다’(acting well)는 부사입니다.

‘카리스테’는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라는 어근에서 온 것으로 ‘은혜를 베푼다’(to show one's self gracious)는 뜻이죠.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 힘이나 지혜나 능력으로는 그곳에 하나님의교회를 세울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에 주님의교회를 세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이죠.

 

사실 ‘은혜를 베푼다’는 ‘카리조마이’도 ‘은혜’(grace)라는 ‘카리스’(χάρι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말의 뜻은 본래 질서와 아름다움과 관련된 모든 것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지성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추함과는 반대되는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죽음과 반대되는 생명을 뜻합니다.

혼돈과 반대되는 질서를 뜻하는 말이 은혜죠.

 

그런데 이 단어를 성경 기자가 쓸 때 어떤 의미로 승화시켰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아름다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회에 베푼 질서를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도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아름다움과 생명과 질서 앞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깨달음)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은혜 받은 사람인가, 내가 감사를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 말이죠.

내 주변에 나로 인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생명을 경외하며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아름다움도 생명도 그리고 질서와 조화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감사도 잃고 사는 사람이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이기적이고 고집스럽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종교와 타협하거나 양보하거나 협력하지 않으려는 성향 때문에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종교를 넘어 일반생활처럼 여긴다면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생명을 경시하고 아름다움을 짓밟고 그리고 사회의 질서와 도덕을 헤치며 산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면 말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나로 인해 누군가 아름답고 선하게, 생명을 중시하고,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겠죠.

누군가를 나를 교제하면서 인생관이 선하게 바뀐다면, 그 주변이 아름답게 변하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이죠.

바울도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도구 삼아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은혜안에 머물게 하셔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적용)그런데 바울이 언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한다고 고백을 합니까?

‘항상’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셋집에 갇혀 있을 때 4개의 옥중서신을 써 보냈는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죠.

그런데 빌립보서를 쓰면서 뭐라고 고백을 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1:1-3)

바울은 로마의 셋집과 같은 감옥에 갇혀 있는 형국에서도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셋집에서 자신을 지키는 군사와 함께 손과 발에 쇠사슬을 차고서 먹고 자면서 살았습니다.

그토록 얽매이고 답답하고 불편한 상황속에서도 바울은 감사한다고 고백을 한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일이 잘 풀릴 때,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거나 좋은 곳에 취직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감옥에 갇히거나 매이는 삶을 살 때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죠.

외적인 상황과 환경은 답답하고 얽매이고 갑갑할지라도 나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주일날 요한복음 15장을 통해 살펴봤듯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며 누군가의 인생을 새롭게 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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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작품소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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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바울이 서로가 잘났다고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파벌을 형성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그들이 서로 다투고 잘났다고 소리치며 파벌을 형성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기 때문이지 않더냐?”

“바울의 부족함 가운데서도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울을 도구 삼아 그들을 구원하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감사하며 산 것 아니더냐?”

“더욱이 로마의 셋집에서 얽매여 살 때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감사한다고 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로 인해 누군가 새로운 생명의 삶 아름답고 선한 삶,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주님의 은혜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네가 주님을 만난 이후 네가 생명을 중시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좇고 질서와 조화를 이는 것 때문에 누군가 그 영향을 받아 변화되고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이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것을 볼 때면 너의 마음 속에도 바울처럼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지 않겠느냐?”

 

(찬양)은혜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본문)본문 5-9절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원해) 여기에 ‘이는’이란 헬라어 ‘호티’(ὅτι)로서 ‘왜냐하면 -하기 때문이다’하는 뜻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고린도교인들에게 베푼 은혜가 감사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다섯 가지를 말하죠.

 

첫 번째는 5절 말씀처럼 ‘구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변’과 ‘지식’은 입심이나 말 잘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로고스’(λόγος)와 ‘그노시스’(γνῶσις)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풍족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풍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돈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요한 자가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가 진정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진리를 건져 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두 번째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6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라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증거란 복음을 말하는 것이죠.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주님의 복음을 통해 그들이 견고하게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세상 논리나 황제나 돈의 논리를 좇아 따른다면 어찌 바울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기 때문에 그래도 감사하다는 것이죠.

 

세 번째 감사하다고 하는 이유는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은사’라고 하면 방언이나 신유나 방언통역같은 은사를 떠올리기가 십상이죠.

하지만 바울이 말한 은사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은사’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관련된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도 신유도 방언통변도 모두가 하나님을 잘 믿도록 하나님을 깊이 알도록 베푸시는 은사죠.

그런데 그 은사로 인해 주님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푸시는 것은 주님의 구원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네 번째 감사하다고 하는 이유는 7절 후반절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하고 말하죠.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모로코 지진이 100년만에 가장 강력한 지진인데 3천명이 죽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리비아 대홍수로 사망자가 2만명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지진과 홍수와 전쟁과 테러가 더 극심해질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재림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산다면 누가 허투루 자기 인생을 살겠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안다면 남을 속이거나 부정하고 불의하게 살수가 없는 것이죠.

주님의 재림 앞에 심판대 서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전보다 더 진실하고 더 아름답고 더욱 선하게 살겠죠.

 

바울이 마지막 다섯번째로 감사하다고 하는 이유가 8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다투고 잘못하고 있지만 주님 재림의 날에 하나님께서 견고케 해 줄 걸 믿으면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음행의 문제 파벌의 문제 은사의 문제 제사음식의 문제로 서로 다투고 분열이 생겼는데 말이죠.

 

이런 상황인데도 바울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헬라어 원문은 ‘피스토스 호 데오스’(πιστὸς ὁ θεὸς) ‘하나님은 미쁘시다’가 맨 먼저 나옵니다.

‘미쁘다’는 말은 헬라어로 ‘피스티스’ 곧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잘났다고 서로 다투는 상황인데도 바울이 감사하다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죄로 얼룩진 바울 자신을 바르게 세워주신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분명코 바로 세워주실 것을 믿기에 감사한다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 곧 주님과 교제할 정도로 감사하면서 믿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교제’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 곧 ‘동역자’ ‘반려자’(a partner)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겁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잘 났다고 서로가 옳다고 다투지만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동역자요 반려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하나님 아래 인생의 반려자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분명코 믿음으로 새롭게 세워주실 것을 믿는 것이죠.

 

(깨달음)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작든 크든 오래되었던 신생교회든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다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다투고 서로 불일치해도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죄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누군가 불의한 모습을 보여도, 누군가 자기 은사를 자랑해도, 자신이 하나님의 잣대로 평가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들보를 보고 그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떠올리며 상대방을 그런 긍휼로 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를 품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지금 연약한 그 누군가를 향해서도 주님의 은혜로 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품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코 변화시켜주실 것을 믿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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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나도 죄를 짓고 연약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를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시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며 살게 해 주세요.”

“누군가 능력을 과시하고 받은 은사를 자기 자랑으로 삼을 때 그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의 은혜로 품게 해 주세요.”

“전쟁과 기근과 홍수와 난리의 소문을 듣는데 주님의 재림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때에 주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더 아름답고 선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이 세상 그무엇보다도 복음의 통로로 하나님의교회의 도구로 살아가는 삶에 성실을 다하게 하시고 주님의 날에 상급을 받게 해 주세요.”

 

(찬양)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깨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주소서

나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깨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주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긍휼로 품어주시는 은혜의 아버지이십니다.

파벌을 짓고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은혜와 긍휼로 품으시는 아버지이시죠.

바울이 자신에게 베푼 그 은혜를 떠올리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바라며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로 인해 내 주변의 누군가 아름답고 선한 인생, 생명의 삶,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 있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혹여라도 내게 허물과 연약함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를 품어주신 은혜의 하나님을 떠올리며 그를 품는 바울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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