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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고전1:13-17)

by 똑똑이채널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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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지혜로 아니함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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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오늘 새벽에 살펴본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3-20절 말씀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속의 소금임을, 세상 속의 빛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이죠.

 

물론 소금의 특징은 녹는데 있습니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그 맛을 짜게 할 수도 없고 방부제 역할을 할 수도 없죠.

세상에서 너희가 소금처럼 녹아야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빛도 마찬가지죠.

빛은 등불을 켜야만 빛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을 태워야만 가능한 법이죠.

 

그만큼 세상 속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 위해선 주님의 뜻을 받들어 녹이고 태워야 가능한 것이죠.

세상을 향한 헌신, 세상을 향한 섬김, 세상을 향한 내어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죠.

 

(적용)내일 모레 금요일날 50대목회자 축구대회가 대전에서 열립니다.

그를 위해 우리 지방회 목회자 대표자 목사님께서 5만원씩 협력했으면 하고 공지에 올렸습니다.

모든 조직과 단체가 움직이는데 일정기금이 필요한 것처럼 그 기금으로 차를 빌리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대표자 목사님께서 한 말씀 더 하셨습니다.

그날 공을 차는데 중간에 선수를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쳐 보이거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으면 중간중간에 바꾼다고 말이죠.

그래도 왜 나를 빼냐고 불만을 제기하지 말고 공동체를 세우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이죠.

 

그렇죠.

하나님의나라도 하나님의교회도 그렇게 해서 세워가는 법이죠.

서로가 자기 주장 자기 의견만 강화해서는 결코 상대방을 포용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는 법이죠.

하나님교회를 위해 십일조와 감사와 주일헌금을 드리는 것도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일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공동체를 위해 내 주장을 내려놓고 협력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하나님의교회를 세우는 길 중의 하나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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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첫마디에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론에 접어들면서 맨 먼저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편지를 쓴 목적을 밝히는 것처럼 ‘온전히 합하라’라고 권면한 것이었죠.

 

‘합하라’는 뜻은 북한의 김정은이나 히틀러의 전체주의처럼 획일화를 보이라는 것이 아니었죠.

서로의 개성과 신앙을 존중해주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제물되신 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라는 것이었죠.

‘합하라’는 헬라어 ‘카타르티죠’(καταρτίζω)는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다’는 뜻이 있다고 했죠.

서로가 주님의 몸을 받들기 위해 ‘합하라’는 것은 누군가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해고 꿰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만큼 신앙이 성숙하게 되는 척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탈피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키워나가는 것이죠.

우리도 나라는 우물에서 탈피해서 한 사람 한 사람 더 많은 사람을 품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전개)바울이 그렇게 서로 꿰매어주는 자세로 합하도록 하면서 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이어서 언급했죠.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11-12절 말씀을 통해 바울이 글로에의 집 사람을 통해 분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죠.

‘분쟁’을 뜻하는 헬라어 ‘에리스’(ἔρις)는 서로 투쟁하고 다투는 형국(contention strife wrangling)을 가리키는 단어였죠.

서로가 옳다고 말다툼하고 상대방의 마음까지 상처를 줘서 찢길 대로 찢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찢기고 상처를 주면서까지 분쟁하고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는 파벌싸움이 일어난 것이죠.

 

아볼로는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으로 학문과 자식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죠.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뒤에 아볼로가 들어가서 고린도교회를 목회했는데 그를 특별하게 추종하는 무리들이 생긴 거죠.

‘게바’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인데 고린도교회가 헬라에 속해있다면 당연히 베드로라고 해야하는데 굳이 게바라고 밝힙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을 앞세우는 무리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죠.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이들은 바울의 공로와 바울의 은사를 특별하게 추종하는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는 이들도 모두가 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이지만 다른 파벌을 일부러 만들고자 한 것이죠.

 

(깨달음)중요한 것은 이 짧은 구절에 헬라어 원문에 ‘나’라는 말이 네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거죠.

오직 나, 나, 나, 나, 나의 주장 나의 은사 나의 지분 나의 가르침 나의 의식만 옳다고 여기는 모습들입니다.

파당을 짓는 이들 모두가 자신의 사적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다투는 상처투성이만 남는 것이죠.

그만큼 나 중심의 사고방식 우물안 개구리 모습을 내려놓아야만 타인을 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분쟁을 넘어 주님의 화평 속에서 하나님의나라 하나님의교회를 세우는 길입니다.

 

 

[전자책]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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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그 분쟁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말씀인데 본문 13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원해)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하는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어찌 여러 조각으로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뜻이죠.

바울을 따르는 바울파는 4분의 1을 갖고, 아볼로파도 4분의 1, 게바파도 4분의 1, 그리스도파도 4분의 1을 갖고 나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냐,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하고 말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세례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 아니더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보’란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회당장을 맡은 사람입니다.

‘가이오’는 로마서 16장 23절을 보면 바울이 로마에 머물 때 가이오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 주인입니다.

바로 그 두 사람에게만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물론 예수님의 이름으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죠.

 

그런데 16절에서는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밝힙니다.

좀 전에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엔 세례를 준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뒤에 가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줬다고 말하죠.

왜 구별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 바울이 에베소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그리스보와 가이오는 고린도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너희들과 사는 사람 중에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세례를 준 사람이 없다는 걸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바나는 어디에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 16-17절을 보면 스데바나는 고린도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인데 지금은 바울을 돕고자 스데바나가 함께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종합해 보면 너희와 함께 있는 사람 중에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줬고 너희와 함께 했지만 지금은 너희와 떨어져 있는 스데바나에게 세례를 줬지만 그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왜 바울이 이렇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만큼 바울은 파당을 세우고자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죠.

비록 아볼로나 베드로는 자기 파당을 세우기 위해 그들 각자의 이름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초창기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만큼 바울은 세례를 사유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를 17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혀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나더러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게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고린도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 말이 얼핏 보면 바울이 세례를 폄하하거나 세례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바울은 세례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 세례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 자체를 세례로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는 갈라졌지만 다 통과한 후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합쳐졌습니다.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요 과거 애굽의 노예 종의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고 세례받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물로 세례를 받는지 물에 완전히 잠기는 세례를 받는지, 그 형식은 중요한 게 아니죠.

세례를 통해 옛 과거의 죄악된 삶을 단절하여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의 삶 복음을 사는 게 중요하죠.

 

바울이 세례의 본질을 명확하게 일러주는 구절이 로마서 6장 3절 말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리고 세례 받은 이후의 삶을 위해 로마서 6장 5절에 이렇게 밝혀줍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적용)우리도 세례 받을 때 나의 모든 죄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이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영적인 가나안 땅 곧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사실을 고린도교회 성도들들에게, 파당을 짓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절을 통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사명을 받고 고린도에 왔는데 말의 지혜로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의 지혜’란 철학과 수사학을 말하는 것이죠.

그 당시 헬라사람들은 철학과 수사학 곧 논리적을 말을 잘 하는 사람을 집에 선생으로 모시고 배우고 익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 곧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데 그런 인간적인 지식이나 철학이나 말장난으로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죠.

그를 위해 고린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것이고 지금은 에베소에서 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죠.

 

(적용)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파벌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는 이들은 말의 지혜만 앞세울 뿐 예수님의 복음을 삶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제부터라도 복음을 삶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은 복음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데서 시작이 되죠.

복음의 삶을 살면 문제가 없는데 말읿니다.

우리 자신의 복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삶을 좇아 사는 걸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적인 말 자기 중심의 언변을 내세우거나 자기 행위를 강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 외에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천국을 내다보며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 복음의 이력서를 바르게 쓰는 자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내 이름 값을 내세우거나 내 이론이나 내 지식이나 내 언변술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기 자신을 죽이며 사는 복음의 이력서 말입니다.

 

 

[전자책]하나님의 시간표 - 예스24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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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말의 지혜로 사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고린도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파벌이 생긴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다들 자기 이름값과 말의 지혜만 내세우려 한 채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의 삶을 제대로 산 게 아니지 않느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함께 있는 그리스보와 가이오외에는, 또 지금 자신을 돕고 있는 스데바나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밝히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다른 파벌을 내세우고 추종하는 무리들도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 분의 복음을 전하는 걸 목적으로 삼도록 하라는 뜻이지 않더냐?”

그것은 세례의 본질을 일깨우듯 예수님께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은 천국 본향을 향한 복음의 삶을 신실하게 살 것을 주문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큰 울림을 주는 것 아니더냐?”

사랑 사랑 사랑을 이야기해도 한 번 베풀고 나누는 것이 큰 감동을 주는 것 아니더냐?”

그만큼 너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죽고 다시금 태어났다면 이제는 입으로가 아니라 그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소금이 그 맛을 내는 것도, 빛이 그 빛을 드러내는 것도, 녹아야 하고 태워야 가능하듯이 말이다.”

주님께서는 네가 공동체를 위해 세상을 위해 녹아지고 태워지길 바라고 있지 않겠느냐? 그것이 복음으로 사는 길이니 말이다.”

 

(찬양)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계심으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전자책]야긴과 보아스 - 예스24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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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해결하는 제시책이 무엇이었습니까?

각자의 지분을 내세우는 이들이 언변을 내세우면서 자기 행위를 강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했죠.

바울도 그래서 자기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이들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오직 자신이 세례를 준 것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 것도 자기 언변술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빚진 삶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자가 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삶의 이력서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분쟁을 해소하고 다툼을 없애고 서로 합할 수 있는 길은 복음의 삶을 사는데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셨듯이 소금으로 녹는 길, 빛으로 태우는 길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위해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위해 녹이고 태울 때 거기에 하나님의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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