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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고전2:1-5)

by 똑똑이채널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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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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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새벽에 마태복음 17장을 살펴보고 있는데 거기에 어떤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죠.

그리고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겠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좀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하면서 사탄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죠.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면 베드로처럼 칭찬을 받지만 내 욕심이 앞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으면 사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일깨워준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헬몬산에 올라가셨습니다.

헬몬산의 산봉우리 끝자락이 이어지는 곳이 바로 가이샤라 빌립보요 헬몬산의 한 봉우리에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려가신 것이었죠.

그 산에 올라간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었는데 그곳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셨습니다.

얼굴에 광채가 났고 옷이 깨끗한 옷으로 변형되셨고,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산을 변화산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와 같은 놀라운 광경을 본 베드로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17:4)

 

나무너도 황홀한 그 광경에 도취된 베드로는 힘들고 고달픈 산 아래로 내려갈 게 아니라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초막 하나는 예수님을 위해 짓고, 다른 초막은 모세를 위해 짓고, 또 다른 초막은 엘리야를 짓고 살자는 것이죠.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17:5)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려주신 하나님께서 뭐라는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황홀경에 도취돼 초막 셋을 짓자고 하지만 너희들은 너희들의 구주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곧장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깨달음)이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까?

믿음은 황홀한 신비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뜬구름 잡는 게 아니라 복잡하고 죄 많은 이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뒤로 한 채 어느 교회에 기도원에 들어가 사는 것은 참된 믿음일 수가 없는 것이죠.

 

(적용)우리가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주차장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주유소로 삼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주님의 음성과 말씀을 채워 세상 한 복판에 영적으로 싸워나가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자, 하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산 아래에 갈릴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그 역사는 세상을 마주해야만 일어나는 일들이죠.

우리의 믿음도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그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은혜 때문이죠.

내가 믿음이 좋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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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죽음은 비수처럼 찾아옵니다.

그 예고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의 지성도 소유도 가문도 아무것도 자랑할 게 못됩니다.

그날 죽음을 막아 낼 줄 방패는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죠.

그날 그 죽음을 뛰어넘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대속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하나님 품에 안겨주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뭐라고 권면했습니까?

너희들이 자랑하고 싶으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고 말했죠.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벌과 은사를 자랑하지만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들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겠죠.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죽음을 뛰어넘게 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해주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사나 달란트나 믿음이나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죠.

 

(본문)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신비인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절이 형제들아하고 시작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지금가지 네 번에 걸쳐서 ‘형제들아’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1장 10절에, 1장 11절에, 1장 25절에, 그리고 오늘 2장 1절에 ‘형제들아’하고 부르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왜 ‘형제들아’하고 부르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질책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주님의 호흡으로 가다듬기 위함이죠.

 

우리도 내 이치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간에 예수님의 호흡으로 한 번 가다듬어야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바울이 그런 마음과 자세로 그 중간 중간에 ‘형제들아’하고 주님의 호흡으로 가다듬고 있는 거죠.

 

1절을 다시 읽어보실까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원해)여기에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했다’고 하는데 언제였을까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1년 반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그때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했다’고 하는데 ‘증거’라는 헬라어가 ‘마르튀리온’(μαρτύριον)입니다.

그 뜻은 ‘증거’(testimony) ‘증인’을 뜻하지만 보통 ‘순교’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헬라어 ‘마르투스’(μάρτυς)가 나온 것이죠.

 

바울은 순교자의 마음과 자세로 고린도에 들어가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한 게 아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대언변가요 대수사학을 배운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랑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일 그것들을 자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퇴색되고 본말이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죠.

 

(깨달음)바울이 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기 도가 맞다 자기 은사가 맞다고 다들 자랑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뒤로 밀려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언변과 지혜와 수사학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증거해왔다는 것입니다.

 

(전개)본문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역본)이 말씀을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의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서” 하는 말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하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 성도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원해)여기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할 때 ‘알다’는 헬라어 ‘에이도’(εἴδω)는 ‘보다’(see)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살았다는 뜻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 속에서만 살라는 뜻일까요?

 

(나예)예전에 서울에서 개척할 때 어느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인천에서 사는데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이 내려와서 저지른 일로 믿고 있었죠.

그만큼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분이었는데 문제는 그것보다 신앙생활하는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분이 경기도 양주의 어느 교회에 ‘지옥의 소리’라면서 유튜브 영상으로 틀어주는 집회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교회 집회에 참석해서 ‘지옥의 소리’를 듣고는 그 교회에서 회개하며 살겠다고 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그 교회에 가서 회개 기도를 하며 살겠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 ‘지옥의 소리’는 그 교회 목사와 전도사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최진실과 최진영도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과 마더 테레사도 지옥에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때 제가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한 때 입신해서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분들이 유명인사가 되어 부흥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박영문 장로도 그렇고 미국의 펄시 콜레 목사도 그렇고 스웨덴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그것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여기며 더 겸손하게 신앙생활하는 은혜로 삼으면 됩니다.

그것을 자기 자랑 자기 은사로 여긴 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다는 ‘지옥의 소리’는 교회 목사와 전도사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게 되죠.

그렇게 지옥의 소리만 집중하면 성경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선한 뜻으로 했을지라도 나중에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같은 기독교 무당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파묻혀 살겠다는 그 집사님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 모습인지 알 수 있죠.

그것은 세상의 일을 다 팽개치고 기도원에 파묻혀 살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재림이 그 교회와 그 기도원속으로 온다는 것과 같은 이치죠.

하지만 주님의 재림이 어느 곳으로 임하신다고 했습니까?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24:40-41)

 

주님의 재림은 밭을 가는 현장으로 맷돌질 하는 일터의 현장으로 말이죠.

그렇기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서 자신들만의 교회와 기도원으로 가둬놓는 것만큼 어리석은 이단 사이비도 없는 것이죠.

 

(적용)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쳐다보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지만 고린도의 흐름과 세상에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대해 신경 끄고 세상과 담을 쌓고 달라는 게 아니죠.

세상 흐름과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하지만 그 목적을 주님의 십자가와 복음에 초점을 두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세상의 흐름도 알고 신문도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흐름을 꿰뚫고 있어야 하죠.

다만 그런 것들을 알고 꿰뚫어보지만 그 목적은 바울처럼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한 영혼을 살리는 길이요 그것만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참된 믿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제쳐놓고 ‘지옥의 소리’를 전하는 교회안으로 들어가 살겠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어느 기도원 산속에 들어가살겠다는 것도 바울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요 재림하실 주님께서 원하는 바도 아니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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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담을 쌓지 말고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십자가 증인으로사는 목표를 갖고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의 믿음은 교회 안에 갇히거나 기도원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살자 했지만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더냐?”

참된 믿음은 교회나 기도원에 갇혀 사는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 한복판의 상황을 꿰뚫고 살아가는 믿음이지 않더냐?”

바울이 고린도에서 십자가를 최우선시하며 복음의 증인으로 산 것도 고린도 한복판에서 행한 일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지옥의 소리와 같은 교회나 신천지 집단과 같이 교회 안에 가두거나 기도원 안에 가두는 그런 집단도 잘 분별해야 하지 않겠느냐?”

참된 믿음은 교회나 기도원 안에서 드러는 게 아니라 이 험악한 세상 복잡한 세상 한 복판에서 싸워나가는 영적인 전쟁이지 않더냐?”

바울도 그 고린도의 영적 전쟁터에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잘 분별했고 그 중심에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산 것 아니더냐?”

오늘을 사는 너도 이 세상의 흐름을 잘 분별하되 오직 십자가 증인의 삶을 사는 데 목표를 두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위해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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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주차장이 아니라 주유소와 같은 곳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설교를 말씀으로 영성을 채운다음 세상 한 복판으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눌러 사신 게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가 세상에 힘들고 고달픈 이들을 만나러 가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뜬구름 잡는 것도 무릉도원을 그리는 것도 아니라 세상 속에서 겪고 헤쳐나가는 영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영적으로 혼탁한 고린도의 흐름을 잘 파악했고 그를 통해 십자가 부활의 복음만을 최우선으로 전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을 등지고 살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잘 분별하면서 오직 십자가 증인으로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서 참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은 내 힘이나 내 자랑이나 내 믿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승리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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