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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자요, 헤롯 안디바의 죄악을 규탄하다가 참수형을 당한 자였기에,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이 땅에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자가 업을 정도로, 그야말로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읽은 내용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례요한의 업적과 능력을 칭찬하지만, 그러나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권이 임하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들,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에게 주님의 온기와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돌보고 베푸는 자가,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쏠려 있어야 하는지 깊이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세상의 존귀함과 부러움을 받는데 쏠리기보다 작고 여린 사람들의 마음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쏠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뿐만 아니라 저 천국에서 큰 자요 가장 귀한 상급을 받는다는 사실이죠.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전파 사역을 하신 고을들, 주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많이 펼치셨던 그 전략요충지의 마을들에 대해 책망하신 내용입니다. 그 고을들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대부분 갈릴리 지방의 마을들입니다. 본문 21-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을 언급하며 책망하신 내용입니다. 이 고을들은 모두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특히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특히 더 많은 기적을 행하셨죠.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들의 이름을 언급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과연 그렇게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을에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는데, 오히려 그 마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갈릴리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에 비해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주 무대가 갈릴리였기 때문이죠.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이 다른 지방의 출신보다 훨씬 많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 마을 동네 사람들은 주님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들의 귀신을 쫓아내주셨는데도, 그들이 주님을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또 그런 일들을 겪은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죠. 특히 기적 중심의 신앙, 체험 중심의 신앙, 응답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이렇게 변질되는 경우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과 직장 문제가 닥쳐왔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다가도 그것이 응답받고 해결받으면 언제 그랬냐 싶게, 그 신앙심을 저버리는 경우 말이죠. 갈릴리 사람들, 그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두로’와 ‘시돈’은 어떤 지역이겠습니까? 이곳은 ‘페니키아’를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베니게’로 불리는 도시죠. 북왕국 이스라엘의 7번째 왕인 아합과 결혼한 이세벨이 그 두로와 시돈 국가, 곧 페니키아 출신의 왕비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세벨이 시집 올 때 그 나라의 우상과 그 우상을 숭배하고 조장하는 선지자들을 많이 데려왔고, 그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키우고 먹이고 훈련시킨 그런 악녀였죠. 그러니 아합 왕이 다스리던 그 시절에 북이스라엘 곳곳은 온 땅이 우상으로 물들게 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 두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죄악에 대해 심판할 것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유인 즉 이스라엘과 맺은 형제의 계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에돔 나라에 노예로 팔아버린 두로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 심지어 에스겔 선지자도 두로와 시돈의 교만을 지적하며 그런 멸망을 예언하기도 했죠.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28:16-17) 가장 무역이 활발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은금보화를 쌓아 놓고, 모든 권력과 무기고를 정비하며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탁월함 속에서 교만을 자랑하던 그 두로가 순식간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이 두로를 종종 타락한 천사장, 곧 사탄에 빗대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그토록 탁월하고 또 그토록 교만하던 두로도 멸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돔도 멸망을 당했죠. 우리가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심층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해, 그 소돔이 멸망받은 이유에 대해 살펴봤었죠.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16:49-50) 소돔이 멸망받은 이유는 동성애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들을 돌보지 않는 거만한 마음이 가장 큰 원인이고, 하나님의 앞에 가증한 우상숭배를 좇고 짐승과 교합하고 그리고 동생애를 행하는 죄악은 부차적인 죄악들이었죠. 그런 죄악과 교만으로 인해 하나께서는 소돔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그런 이방 나라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런 죄악의 도시, 그런 죄악의 백성들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권능을 펼쳤더라면, 차라리 그들이 회개하면서, 그들의 심령 속에 주님의 온기와 따스함이 깃들 것인데, 지금 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도무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퍅한 심령, 더 깡마른 심령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스기니스의 〈악마의 비밀문서를 훔치다〉에서도 오늘날 마귀의 전략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곧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죠. 복음의 진정한 핵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채, 복음의 현상만 관심을 갖는 것 말입니다. 문제 해결의 응답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해결의 근원자 되시는 주님의 생명과 주님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그런 마음까지도 다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울 것을 요구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8-30)
소에게 멍애를 씌우는 것은 그를 통제하기 위함도 없잖아 있지만, 그에게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함이죠. 우리에게 주님께서 멍에를 씌워주고자 하는 바도 그와 똑같습니다. 복음의 현상에 눈과 귀를 쏟을 게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중심을 갖고 바른 길을 걷게 하시려는 것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두로와 시돈이나 소돔처럼 세상의 자기 탁월함과 교만함에 쏠려 있던 마음이었다면, 또한 갈릴리 사람들처럼 복음의 현상에만 기도의 응답에만 관심을 둔 마음이었다면, 그런 무겁고 어리석은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참된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정말로 복음의 본질의 멍에를 바르게 매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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