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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태복음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마5:33-48)

by 똑똑이채널 202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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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산상수훈’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산상(山上)’ 곧 산 위에 올라가서, ‘수훈(垂訓)’ 곧 교훈을 주셨다는 뜻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교훈과는 다르다고 했죠. 그것은 단순한 인간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서 가르치는 권위과 위엄이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왔던 유대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형식적인 율법의 행위로 인해 그 정신이 상실되고 있는 그것을 갱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은 있었지만,하나님의 백성다움은 잃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말씀을 지키는 형식과 외형에는 치중하고 있었지만 ‘율법의 참된 정신’은 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래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고 자부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결코 의로운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죠. 오히려 그들이 심판과 멸망을 자초한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5:20)고까지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이죠.

어제 읽은 부분은 구약의 십계명 가운데 “살인죄”에 대한 부분과 “간음죄”에 대한 그 율법의 정신을 되짚어 주고 계셨고, 새롭게 그 의미를 살펴서 적용할 것, 갱신할 것을 되짚어 주셨습니다. 육체를 죽이는 것만을 구약에서는 살인죄로 생각해 왔지만, 지금 너희들은 사람의 인격에 대한 살인, 무시하고 짓밟고 ‘라가’라고 욕하는 것 ‘골빈 놈’이라고 깔보는 그런 모든 행위들이 실은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사람이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이었죠.

또한 ‘간음죄’도 남녀가 서로 관계를 갖는 것만이 아니라,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음욕을 품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 뭔가 음흉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지적해 주셨죠. 그렇기에 성은 생명을 잉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선물이고, 결혼을 통해서만 그 성스러운 선물을 유지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성스러움을 짓밟는 것은 곧 성령을 모시는 전인 내 육체와 성령을 짓밟는 행위라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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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이후의 말씀으로서, “맹세에 대한 법”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33-36절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것이 곧 맹세에 관해 예수님께서 재정립해 주시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헛된 맹세를 하지 말고 주님께 한 맹세를 지키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 레위기19장 12, 민수기 30장 2절, 그리고 신명기 23장 21-23절에서 각각 동일하게 말씀해 주고 있죠. 그런데 주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다만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만 말하라고 강조하죠.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맹세가 필요 없을 정도로 진실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옳다고 한 것은 옳은 것으로 드러내는 삶을 살면 충분하고,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내는 진실한 삶을 살면, 모두가 인정해 주기 때문이죠. 그것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할 율법의 정신이자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보복에 대한 법”입니다. 본문 38-42절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구약의 율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동태복수법을 강조하는 계명이었습니다. 누군가 눈의 어느 부위를 다치게 했다면 그 정도로 보복을 하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주라고,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죠.

이것이 무엇을 요구하는 말씀입니까? 당한 것만큼만 복수하고 그 이상은 넘어가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아예 복수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 애시당초 보복당할 일을 만들지 말고, 모든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살피며 살라는 뜻입니다. 혹여라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다면 그가 민망할 정도의 마음이 들도록 더욱더 사랑하라는 뜻이기도 하죠. 그것이 율법의 원래적인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전자책]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예스24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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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본문 43-48절을 통해 “이웃사랑에 대한 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그 이웃이 누구이며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웃의 대상과 범위를 원수까지 확대하심으로 그 본래적 의미를 해석해주십니다. 불신자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이웃으로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의 요구 앞에 온전하고 의로운 인생이 있을까요?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성경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온전하게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마음에 미움을 가지거나 음욕을 품은 그 순간, 지금까지 지킨 모든 율법이 다 무효가 되고 다 범법한 것이 되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살인과 마음의 간음이 전혀 없으며, 맹세가 필요 없을 정도로 진실한 사람이 우리 중에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손해를 입히고 해를 끼칠 때 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의 요구에 순종해서 다른 뺨도 돌려대며, 오리를 가자고 억지를 부릴 때 십리까지 가주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시 한 두 번은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는 한 두 번이 아니라 항상 언제나 그렇게 하라는 것이죠. 늘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할 때마다 실패합니다. 율법에서는 10번을 성공하다가도 한 번을 실패하면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10번을 지키다가 한번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전자책]야긴과 보아스 - 예스24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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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한없이 절망하고 몸부림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이토록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빛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빛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기 때문이죠. 죄인 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까? 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옷 입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고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폼 나는 종교생활을 할 뿐 실은 죽은 자에 불과할 뿐이죠. 그래서 우리는 나의 행위를 자랑하고, 나의 정신 나의 삶을 드높일 게 아니라 연약함과 부족함과 실수와 허물을 인정하면서, 늘. 예수님께 붙어 있기를 소원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자 하는 삶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옷으로 우리들을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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