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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태복음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마1:1-25)

by 똑똑이채널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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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첫 관문인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시작하신 그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그 사역의 출발을 알리는 것임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는 이력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우리나라에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는지, 또한 그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지금에야 그게 덜 하지만 예전에 가문을 따졌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죠. 그렇듯 예수님 당시의 중동의 문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대 문화에서도 사람을 소개할 때, 그 부모와 집안 곧 그 지파를 알리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마태복음에서 그 족보를 강조해서 알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가나 누가나 요한복음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예수님께서 이어지는 족보’가 생략돼 있습니다. 왜 유독 마태복음에만 그 족보가 강조되어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유인 즉 마태복음의 수신자, 곧 마태복음을 받아서 읽게 되는 대상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이 유대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 그렇게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족보를 맨 처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족보를 소개하는 장면은 창세기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6장에서 노아의 사역을 소개하기 이전에 5장에서 ‘노아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죠. 또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소개하기 이전에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람의 계보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4장에서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하는 것을 소개하기 이전에 창세기 22장에서 리브가의 계보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보’로 번역된 헬라어 ‘게네시스’는 ‘계보’라는 말 이외에 ‘탄생’과 ‘기원’에 관한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제네시스’가 바로 여기엣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계보’라는 단어를 굳이 ‘게네시스’를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학자들은 그 이유를 구약의 창세기와 연관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을 하죠. 이른바 창세기가 인류 역사의 시작이자 곧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시작점이듯이, 마태가 본문의 ‘게네시스’ 곧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소개하는 이유도 그와 똑같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의 역사가 시작이 되듯이, 신약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새 해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동해안이나 서해안으로 해맞이와 함께 새 해를 맞이하고자 하죠. 또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시작점을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창조자와 함께 이 세상의 구원자와 함께 시작을 해야 하죠. 바로 그것을 강조하고자 마태는 ‘족보’라는 단어 곧 창세기에의 ‘제네시스’에서 파생된 ‘게네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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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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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조죠.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아브라함을 맨 처음 언급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인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 축복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다윗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맨 처음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 다윗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왕의 후손으로서, 왕이심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알리고자 한 뜻입니다. 그 다윗 왕과 관련하여 사무엘하 7장 12-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 왕의 후손을 통해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죠.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언약을 성취하신 것임을 마태가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브라함의 언약 그리고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

오늘 본문의 족보 가운데 또 하나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지난 명절 때 안동 권씨 사맹공파 족보 책을 새로 발간해 낸 것이 한 권 있길래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족보 역시 여성 중심이라기보다는 남성 중심의 족보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그 족보 속에 여성의 이름이, 그것도 네 명의 놀라운 여성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다들 문제가 있는 여성들 이름이죠.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시아버지를 속이고 임신한 여인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기생이었죠. 룻은 이방 모압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과 부정을 통한 여인인데, 그녀의 이름을 밧세바라고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또한 다윗의 후손으로, 축복의 씨앗의 후손이자 또 왕의 후손으로 오신 분임을 그 족보 맨 머리에 소개하고 있다면, 적어도 다윗의 흠집은 드러내주지 않으려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마태는 다윗 왕의 흠결을 고스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추구하고자 했던 왕국은 그토록 연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고,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 태어났지만 결코 인간의 정분을 통해 태어난 분이 아니라 동정녀 곧 성령을 통해 태어나신 분임을 알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서 태어나셨지만,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이기에, 모든 인간의 아픔과 연약함을 품을 수 있는 분임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죠. 내가 비록 영적으로는 이방인이었고, 또 죄로 물들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도 새로운 구원의 족보에 편입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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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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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25절까지가 오늘 1장의 후반부인데 여기에서 강조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18-20절만 우선 보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여기에서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주목하는 사람은 보통 마리아죠. 그런데 마태는 요셉을 주도적인 인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하고 강조하고 있고, 18-25절 끝부분까지 요셉을 강조하고 있고, 그가 끝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의로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 가부장제 사회의 풍토를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함에서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취한 자세와 같습니다. 고린도전서9장 20절 말씀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야만인에게는 야만인처럼 그들의 문화와 풍토를 존중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그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바로 마태와 같은 관점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곧 복의 언약과 왕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 인간의 연약함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 자신이요, 우리의 연약함을 품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을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그 통로의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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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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