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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언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유아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있고, 성년의 때에 세례를 받은 분들도 있죠. 교회에 새로 등록하게 되면 새신자 등록카드를 적어내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신급을 공란으로 표시하는 분들이 많죠. 그래서 후에 만나게 되면 세례를 언제 받았는지, 여쭈어보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분들은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 때인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대학생 때인지, 아니면 성년의 때인지, 그 날과 그 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 날짜, 그 일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세례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 성결교회와 장로교회와 감리교는 세례를 약식으로 베풀지만, 침례교단은 본 형식에 맞게 물에 완전히 잠그게 하는 세례를 받게 하죠. 하지만 세례의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게 세례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3장에는 세례를 주는 자와 세례를 받는 자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세례를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렇죠. 세례 요한이죠. 그리고 세례를 받는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예수님 이전에 수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죠.
요한은 그처럼 그의 역할, 그의 사명이 곧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베푸는 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는 자가 회개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해 세례 받을 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사실 세례란 회개의 공적인 표식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씻고 새 삶을 찾아 살겠다는 뜻으로 세례를 받는 것 아닙니까? 이전의 죄악들을 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그 물을 뿌림으로서, 새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의 예식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세례를 홍해를 건넌 의식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1-2)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은 것으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이전에는 애굽의 종된 삶, 사망의 삶에 매여 살았지만, 홍해를 건넌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며 살겠다는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넌 것 자체를 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해 내는 것이죠.
마찬가지죠. 저와 여러분들도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삶, 곧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겠다는 결단이 바로 세례가 지닌 본질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죄악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의 백성들,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단지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만하는 행위와 같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본문 2절을 통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는 말씀과 더불어 본문 8절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 합당한 열매에 대해서, 본문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3장 11-14절을 통해 세례 요한은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회개에는 합당한 변화된 삶이 수반되어야, 입술의 회개하 아닌 삶의 회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회개요, 그것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자, 세례받은 이후에 변화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죠.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세례받은 날짜가 언제인지, 그 날과 그 시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내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는가?, 내가 나누고, 베풀고, 강탈하지 않고 거짓으로 살지 않고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죠.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 그 합당한 회개의 열매에 대해 사람들이 자복하며 나아와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문 5-6절이 그것을 증거해 줍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과 장애물을 세우는 것 아닙니까? 어찌 보면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죠. 그들은 세례 요한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아브라함의 자식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던 그들은 결국 ‘독사의 자식들’로 불렸고, 실은 하나님과 가장 먼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세례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끊임없이 겸손한 자세를 지니며,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려는 태도, 하나님과 장벽을 허물어뜨리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려는 태도 말입니다. 그런 자세와 태도를 지니는 자가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죠.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은 백성들 앞에서 강력하게 선포했던 세례 요한은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세례의 위엄을 나타내며 백성들 앞에 회개를 촉구했지만, 정작 자신보다 더 위대하신 분, 자기 자신은 아무런 것도 아님을, 나는 그 분을 준비하는 단계의 사람일 뿐임을 나타낸 말씀이 그것이죠.
본문 11절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의 한계점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에서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그런데 누가복음 12장 5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른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세례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가 없으신 분이시죠. 그렇기에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죠. 그런데 십자가 죽음을 세례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죄 있는 인간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 없는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죽음을 앞에 두고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15절에서 내가 너에게 세례를 받아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인간의 모습처럼 친히 낮아져 세례를 받아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란 뜻입니다. 마치 회사의 사장도 직원들과 똑같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회사를 사랑하고 직원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들처럼 똑같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내신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하늘에서는 17절 말씀처럼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때 하나님께서 친히 격려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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